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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인격적인 신뢰가 무너진 세상
[[제1540호]  2017년 3월  4일]

내가 스물아홉 살에 경험한 작은 일인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잊혀 지지 않는 가지 사건(?) 있다. 당시 신설학교인 신일중고등학교 교사로 채용이 되어 학교에 부임한지 달이 되던 어느 날이었다. 신임교사에게는 달간은 숙직의 의무를 면제해주더니 달이 지나자 숙직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당시 국어, 영어, 수학 교사들은 일주일에 번씩 3 교실에서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3 학생들의 야간자습을 지도하던 제도가 있었는데 나의 번째 숙직일이 공교롭게도 야간자습지도일과 겹치게 되었다.

초저녁에는 50 후반의 투박한 평안도 사투리가 인상적인 집사라는 용인(傭人) 서무실을 지키고 있었으므로 자습지도가 끝나면 숙직실로 가리라 생각하고 서무실을 경유하지 않고 3 교실로 올라가 자습지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저녁 8시경, 장윤철(張允哲, 1908~2003) 교장님이 서무실에 들러보니 숙직교사가 보이지 않자, 집사에게 물으셨던 같다. 오늘 숙직교사가 어느 분입니까?” “숙직 일람표에 보니문덩(?)선생인데 아직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질 않고 있습네다.” “, 문정일 선생입니까? 그분은 그럴 분이 아닙니다. 아마 영어과 교사이니까 5 3 교실에서 자습지도를 하고 있을는지 모르지요. 내가 3 교실을 한번 둘러보고 오리다.

잠시 , 교장님은 서무실로 돌아오셔서문정일 선생은 지금 3 자습지도 중입니다. 자습지도가 10시까지니까 10 5분이면 숙직실로 이라고 말씀하셨던 같다. 자습지도를 마치고 서무실에 도착하니 집사님이 환히 웃는 얼굴로 말하였다. 당고당(장교장) 선생님이 말씀하기를 선생이 10 5분에 오신다더니 아주 정확하게 시간을 맞춰 오셨수다래!라고 하면서 초저녁에 있었던 교장님과의 대화 내용을 전해 주었다.

어찌 보면 이야기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기관의 수장(首長) 말단 직원을 인격적으로 존중하고 신뢰해 준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인가 하는 사실을 나는 새삼스레 깨닫게 되었다. 내가 학교에 근무하는 , 나를 신뢰해 주시는 교장선생님을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성실히 근무하리라 다짐을 했었다. 자신을 전폭적으로 믿어주는 분을 낙담시키거나 배신하는 것은 사람의 도리가 아니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얼마 , 국회의 탄핵 의결로 일체의 직무가 정지된 박근혜 대통령이 대통령 재임시절 장관직을 맡았던 씨가 특검 검사 팀에 참고인 신분으로 출석해서 <문화예술계의 블랙리스트 의혹> 관련하여 취재진 앞에서 20 분간 작심발언을 쏟아내면서 고립무원(孤立無援) 전직 수장에게 시종 불리한 증언으로 직격탄을 날렸다. 이를 두고 진보진영에서는 그를 가리켜영혼 있는 공무원이라고 추겨 세운 기사를 보았다.

평생 교단만을 지켜온 정치에 문외한인 나에겐 너무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날개가 부러지고 수족이 꽁꽁 묶인 전직 수장 앞에 의리나 도리는 내팽개쳐도 좋은가하는 자문(自問) 솟구친다. 자기가 살던 동네를 떠났다고 해서 자신이 먹던 우물에 침을 뱉는 것은 도저히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대통령과 참모 간에 인격적인 신뢰가 무너지면 양쪽이 공멸(共滅)하게 마련이고 자칫 나라의 역사가 불행해지는 단초(端初) 수도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전두환 대통령을 존경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으나 신의나 의리를 말할 전두환-장세동 분을 떠올리는 것은 참모가 현직의 수장을 모실 때나 수장이 퇴임한 이후까지도 목숨을 걸고 수장을 보필(輔弼)하는 참모의 모습이 믿음직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읽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검은 말과 흰콩 말을 섞는 데는 한순간으로 족하지만, 다시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 콩을 고르자면 한나절도 부족하다. 사람이 신뢰를 쌓는 데는 여러 해가 걸려도, 신뢰가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

목원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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