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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서울대학교 시절의 미로학습법
[[제1593호]  2018년 5월  5일]


서울대학교 신입생 시절은 격변과 혼란의 세월이었다. 특히 물리학은 수학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미적분과 확률 등에 대해 충실한 공부가 없었던 나는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시험문제가 나오면 정상적인 방법이 아니라 내가 배운 수학의 공식을 총동원해 정답을 유도해냈다. 그러나 교수들의 평가는 그게 아니었다. “답은 맞지만 정답을 추론해내는 과정이 옳지 않다. 그러므로 점수를 줄 수 없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방법이 아니라 내 방식대로 정답을 찾아내는 일은 정상적인 방법보다 몇 배의 노력을 요한다.

미국의 교육법은 나의 이런 미로학습도 나름대로 높이 평가 해주었다. 전혀 새로운 코스를 개발한 것을 나름대로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평가는 그게 아니었다. 가르쳐 준 길로만 가야 점수를 주는 시스템이었다. 그 복잡한 미로를 헤매고 다닌 후에 정답을 추론해내는 것은 다른 학생들보다 수십 배의 노력과 두뇌회전이 필요한 것인데도 말이다.

경기고등학교 입학시험 때 차석과 총점에서 70점이 앞설 정도의 성적을 올렸으나 대학에서는 그게 통하지 않았다. 겨우 3개월에 불과했던 고등학교 수업이 치명적인 핸디캡으로 작용한 것이다.

그러니 내 경험으로 비추어볼 때 월반은 절대 반대. 그 나이에 맞는 교육을 받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월반을 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심적 고통은 이루 말로 다할 수가 없다.

대학교 1학년 영어시간은 잊을 수가 없다. 당시 영문과 고석구 교수님의 강의는 200여 명의 학생들이 들었다. 고 교수님이 읽어주는 내용을 지명된 학생이 칠판에다 영어로 옮겨 적는 수업이었다. 만약 잘못 옮겨 적으면 선생님으로부터 크게 혼이 나곤 했다.

그런데 한번은 내가 지명돼 칠판 앞으로 호출됐다. 선생님은 맥아더 장군의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강연을 영어로 읽어주며 그것을 적도록 요구했다. 영어공부를 제대로 못한 나는 그만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멍하니 서있었다. 선생님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넌 참 형편없는 고등학교를 나왔구나. 너 같은 학생이 어떻게 서울대학교, 그것도 천재만 모이는 물리학과에 들어올 수 있었지? 이건 서울대학교 망신이다. 이 물리학과에는 고등학교를 3개월만 다니고도 차석으로 입학한 학생도 있는데 말이야.”

교실은 곧 웃음바다로 변했다. 교수님이 자랑한 바로 그 학생이 지금 꾸중을 듣고 있다는 것을 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교수님은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내가 그 정근모인 줄 전혀 몰랐다.

월반을 하거나 정상적인 교육을 제대로 받지 않으면 그만큼 적응이 어렵다. 또한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받는 스트레스도 보통이 아니다. 공부만큼은 물 흐르듯 부드럽게 적응해오던 내 삶에 있어서 처음으로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리던 고통의 시절이었다.

폭넓은 독서와 서클활동은 사고의 폭을 넓혀주는 데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이런 경험들은 입학시험이나 학력경진대회 등에 나가면 어김없이 빛을 발했다. 교내 성적은 아슬아슬한 1등이었지만 큰 시험에서 단연 1등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폭넓은 경험과 독서 덕분이었다.


정근모 장로

한국과학기술원 석좌교수

한국전력공사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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