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신문
뉴스오피니언교양피플미션말씀특별기고 | 지난연재물
[제1606호]  2018년 8월  11일
기사검색
전장연 총회 교단 교계 동정 연합기관행사일정 특별기획 포토에세이
장로열전
빛을 남긴 선진들(목사/장로)
노마트톡
통일밥상
통일로 가는 길
한국교회비사
이슬람과 한국교회
Home > 미션 > 빛을남긴 선진들(목사/장로)
[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21)
[[제1592호]  2018년 4월  28일]

우리 밖의 같은 사람들

5. 대구제일교회 (6)

 

 (2) 1893 4 22 창립설

 

이재원이 편집한 대구제일교회의 110년사에서 이재원은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자를 아담스가 대구에 첫발을 디딘 1897 11 1 창립일로 본다. 이재원은 후세 사가(史家)들에게 존경받은 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대구 경북지역사(地域史) 대한 그의 식견을 높게 평가하고 그의 의견을 존중한다. 그러나 대구제일교회 창립일을 이재원의 주장과 조금 다르게 수는 없는가? 이재원의 주장이 확고한 답이 되어야 하는가? 만약 배위량이 서울이나 평양으로 가지 않고 계속 대구제일교회에서 선교를 했다면, 상황은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배위량은 경상도 선교지부를 대구에 두기로 최종 결정을 하면서이미 우리가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라고 썼다. 여기서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을 유추할 근거를 찾아야 당위성이 있다. 배위량이이미 우리가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말은 그가 이미 대구에 들어와 정착했다는 말이다.

배위량은 당시 선교사이면서 목사의 신분이었다. 이재원은 안의와가 조사 김재수와 함께 왔기에 김재수란 교인이 있어 안의와가 대구에 들어온 1897 11 1일이 창립일이라고 보았다. 목사인 배위량이 대구에 왔고 그와 함께 조사 서경조와 심부름하기 위하여 따라온 박재용이 함께 왔다면 신앙심이 누구보다 투철한 배위량이 대구에 도착한 예배를 드리지 않았을까? 정말 힘든 고난 행군을 통해 대구 읍성에 들어 왔다면 그들이 예배드린 일을 상정하기가 힘든 일이 아니다.

배위량은 1893 4 25 아침 대구 근처인 칠곡 동명면에서 일기를 쓰면서 대구에서 일어난 일을 기록한다. 대구에서 머문 대부분의 시간은 사람들과 종교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보냈다. 그래서 많은 책이 배포되었다. 일기에 나타나는 상황은 그가 대구에 정착해서 복음 전파를 위한 선교활동을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배위량, 조사 서경조가 함께 일한 복음활동은 교회의 탄생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배위량이이미 우리가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 말을 대구제일교회 창립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재원과 그를 존경하는 많은 교회 사가들은 하나같이 이재원의 주장을 따라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을 대구제일교회가 잘못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내세우는목사,’ ‘교인예배당 창립의 3 기본 요건이 갖추어지지 않아 교회의 성립 조건이 형성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이재원의 주장대로라면 배위량이 대구에 들어오던 설교자 배위량은 교인 서경조와 박재용이 함께 있었다. 그들에겐 고정된 예배 처소가 없었다. 그래서 교회 창립의 요소가 갖추어지지 않아 대구제일교회는 안의와가 대구에 들어 날을 교회 창립 기점으로 봐야 한단다. 그러면 고정된 예배 처소가 없는 교회는 정식교회로 보지 않아야 되는가? 말은 일견 맞는 말이지만, 일견 틀린 말이다. 평상시나 교회 성장 시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교회가 시작하는 시기이다. 그런데이동 예배 처소예배 처소 아닌가? 출애굽 이스라엘이 경험한 40년을광야교회 말로 칭한다. 배위량에게 순회전도여행은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과 같은 경험이었고 그와 함께 교회는 광야교회였다. 그를 성령께서 함께 동행하셨기에 그가 위태한 길을 걷고 달리지 않았을까? 하나님께서 순회 전도 중의 배위량을 돕는 사람을 두셨다. 그들이 그의 곁에 있었다면 이미 대구에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수는 없는가?

그런데 배위량은 대구에 영남지역 선교 지부를 두고자 했을까? 그리고 확정적으로 대구에 선교 지부를 두게 이유가 무엇일까? 대구는 당시 경상감영(慶尙監營) 있었던 행정의 중심지였고 지리적으로 영남의 중심이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이라면 이미 부산에 영남 선교 지부가 세워졌고 영남 내륙에 선교 지부를 세우는 것이 대단히 위험한 일이라 배위량이 조선에 있었던 미국 선교부와 미국 본국의 선교부의 확정적인 지지를 받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장로교 사기는배위량이 대구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던 때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전한다. 때를 1893 4 22일에 전도하던 중에 전도했을 개연성이 크다. 그런데 그가 누구인지에 대하여 장로교 사기는 침묵한다. 혹자는 사실을 과장(誇張)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배위량이 대구에서 세례를 베풀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배위량 일행이 물금에 처음 발을 들여 놓았을 여관 주인이 그를 천주교인으로 착각하는 일이 있었다. 영주내매교회의 교회 설립자 <강재원 장로 기념비> 의성비봉교회의 <의성비봉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비> 제일교회 창립과 관련된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영주 내매교회 설립자 강재원장로 기념비에 보면 배위량과 관련된 내용이 아래와 같이 적시되어 있다.

영주 봉화 지역 최초 기독교인 강재원은 1874 생으로 대구 약령시장에서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진주 강씨 유교 집안인 고향 내매마을로 돌아와 예안의 방잠 교회를 내왕하다가 1906 유병두 사랑방에서 십자가 깃대를 높이 달고 예배를 드렸다.  

의성비봉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비비문에 배위량과 관련된 글을 적어보면 아래와 같다.

1893 宣敎師 裵偉良牧師 釜山에서 大邱 宣敎地 옮겨 生命 바쳐 擧族的으로 福音 傳導하던 本洞 거주하시던 金秀英씨가 淸道地方 갔을   노방 傳導 하는 傳導人 통하여 複音眞理 듣고 聖靈 感化 받아 宣敎師 裵緯良牧師에게 洗禮 받고 故鄕 돌아와서 本洞 鄭致福 朴奉順氏 爲始하여 敎人 家庭 巡廻하면서 禮拜 드리다가 1900 3 교회가 設立되었으니 그것이 飛鳳敎會 始作이다

기념비에 따르면 배위량이 1893 4 21 청도에 처음 방문했을 의성 사람 김수영이 청도에 갔다가 그에게 세례를 받은 일이 있었고 이튿날 영주 내매교회 설립자 강재원 장로가 대구에서 배위량에게 세례를 받았다. 그들이 각자의 고향을 돌아가기까지 일정 기간 동안 대구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유추할 있다. 장로교 사기에 나오는 4 22 배위량에게 대구에서 세례를 받은 사람이 강재원일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기록에 나타나지 않지만 복수의 사람이 세례를 받았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이미 100 전에 한국에 전래된 가톨릭의 영향으로 그리스도교에 대한 이해가 어느 정도 있었던 조선 땅에는 이미우리 밖의 (참조. 10:16) 같은 존재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렇다면 복음의 씨앗이 이미 있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이런 가정을 통해서 대구에 안의와와 그의 동료들이 복음을 전했을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온 것과 관련지어 생각할 있을 것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 저작권자 ⓒ 장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저작권문의
이번호 많이 본기사
타락한 천사, 사탄, 루..
기드온의 ‘금 에봇’
147. 철종의 가계도 ..
59. 초락도 금식 기도..
<94-총회총대5>
332. ‘기도합니다’와..
“사나 죽으나, 선하게 ..
<94-총회총대4>
331. ‘고범죄’에 ..
[장로] 평생을 교회·..
만평,만화
“우리나라 만세!”
이단경계주일, 미혹받지 않도록 .....
45주년, 정론직필의 사명을 잘 .....
공지사항
[정기휴간]5월 10일자
[9월 28일자] 추석연휴 휴간..
회사소개구독신청 지사 Contact Us Site Map

한국장로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 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청소년보호책임자: 이승담 | Copyright (c) JANGR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