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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22)
[[제1593호]  2018년 5월  5일]

대구, 선교기지의 기초가 되다

5. 대구제일교회 (7)

 

 (2) 1893 4 22 창립설 (2)

 

단지 이런 일에 대한 것이 기록이 되지 않았던지 기록이 분실되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배위량에게 세례받은 복수의 사람들은 그리스도교에 관심을 가진 자들이었고 이들은 가정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을 수도 있다. 이들의 활동으로 배위량이 대구에서 선교지부를 세울 집과 대지를 구입하고자 했을 관아로부터 쉽게 허락을 받은 것을 우연으로 것인가? 아니면 대구 관아가 외국인에 대하여 좋은 인상을 가졌기 때문일까? 대답을 정확히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대구가 결코 외국인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도시는 아니었다. 임희국에 따르면 당시 대구 분위기는외국인에게 적개심을 드러내는상황으로 외국인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을 있다.

배위량이 대구에 선교지부를 옮기기 위하여 대지를 구입할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원활하게 이루어졌다. 일이 우연이라면 정말 우연일 있지만, 결코 우연히 이루어진 일이 아니었다고 본다. 그런 그들의 관심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필자는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도움 때문이었을 있다고 본다.

배위량이 청도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 놓았을 의성사람 金秀英씨가 청도에 들렸다가 傳導人 통하여 福音 대한 眞理 듣고 배위량에게 세례를 받았다. <의성비봉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비> 비문에 교회가 1900 3 교회가 設立되었다고 했다. 그렇다면 거의 7년간은 그가 고향 의성에 거주했을 수도 있지만 타지에 거주했을 수도 있다. 그가 만약 1900 3 이전 어느 시점까지 타지에 거주했다면 당시 약령시가 열리는 대구를 중심으로 거주했을 개연성이 크다. <의성비봉교회 선교 100주년 기념비> 金秀英 淸道地方 때라고 하지 않고淸道地方 갔을 라고 하는 것을 보면 비문의 문구는 金秀英 청도에 거주하는 상태는 아님을 있다. 그가 어느 시점에 고향 비봉리로 돌아와 鄭致福 朴奉順爲始하여 敎人 家庭 巡廻하면서 禮拜 드리다가 1900 3 교회가 設立되었고 그것이飛鳳敎會 始作이다. 했다. 만약 그가 의성으로 바로 돌아와서 교회를 개척했다면 비봉교회의 시작은 당겨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만약 그가 의성 비봉으로 돌아가 교회를 시작했다면 의성 비봉에 그가 세례 받았던 1893년에서 멀지 않는 시점에 교회가 세워졌을 것이다. 가지 추측은 고향에서 사방천지 불신자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신앙을 지키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金秀英 고향 의성 비봉리에 돌아가서 신앙생활을 하기까지 타지(他地) 머물렀을 개연성이 크다. 필자가 그렇게 추정하는 이유는 그가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도 고향으로 혼자 가서 7년간 신앙을 지킨다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는 대구에서 약령시를 중심하여 일정기간 머물렀을 가능성이 있다. 장로교 사기에 따르면 당시 대구에서 배위량으로부터 세례받은 사람이 있었다. 더욱이 <내매교회 설립자 강재원장로 기념비> 보면 내매교회의 창립연도가 1906년으로 나타난다.

영주 내매교회 설립자 강재원은대구 약령시장에서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에게 전도를 받아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았다. 한다. 그는 고향에 돌아와예안의 방잠 교회를 내왕하다가 1906 유병두 사랑방에서 십자가 깃대를 높이 달고 예배를 드렸다.그가 고향 내매마을로 돌아와 내매에 교회가 세워지기까지 얼마 동안 예안의 방잠 교회를 다녔다. 그렇다면 강재원은 1874년생이니 그가 1893 4 22 어간에 대구 약령시장에 거주하면서 배위량(William M. Baird)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고 대구에서 일정 기간 신앙생활을 하다가 고향 내매 마을로 돌아갔을 개연성이 많다. 그가 21살의 젊은 나이로 그곳에서 바로 고향으로 돌아갔을 개연성보다도 대구에 일정 기간 머물렀을 개연성이 크다. 그곳은1906 유병두 사랑방에서 십자가 깃대를 높이 달고 예배를 드렸다.

대구에서 배위량에게 세례받은 내매의 강재원과 세례 받은 익명의 그리고 청도에서 세례받은 金秀英 뿐만 아니라 배위량의 1893 4 25 일기에 나타나는 종교성이 강한 인물들이 익명의 교인들이 대구에서 가정교회를 이루어 모임을 이어갔을 개연성이 있다.

배위량이 대구에 처음 들어 왔을 그를 만난 대구 사람들은 그에게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배위량으로부터 복음 전도를 듣고 책도 사고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청도와 대구에서 배위량에게 세례를 받은 대구를 중심으로 작은 가정 교회 형태의 소규모 모임이 비밀히 모이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할 있다.

배위량은 대구에 자신의 거처를 정하고베어드가 말했듯이 그들이 대구로 이주했을 이곳에서 평생 그들의 생애를 보낼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배위량이 대구로 이사 얼마 되지 않아그해(1896) 가을에 선교회가 그들을 서울로 옮기기로결정하여 배위량은 가족과 함께 서울로 임지를 옮겼다. 배위량이 임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긴 것에 대하여 대구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배위량과 안애리가 대구를 떠났다는 말을 하는 사람이 있지만, 그런 주장은 배위량의 사정을 잘못 판단한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은 배위량과 안애리 같이 모든 것을 주를 위해 바치기로 하고 결심하고 한국에 선교사가 그런 작은 때문에 죽을 고생하면서 개척한 선교 지부를 버리는 일이 가능했겠는가? 대구 사람들의 지나친 관심 때문에 안애리가 견디지 못하여 배위량이 서울로 임지를 옮겼다는 주장은 잘못된 주장이라고 본다. 만약 정말 그런 위험한 일과 못견딜 지경으로 어려운 지경이었다면 안애리가 자기 친동생 안의와를 사지(死地) 같은 대구로 배위량의 후임으로 보내었을까? 배위량과 안애리가 대구에 들렀을 지나친 관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대구 사람들은 그들에게 친절했다. 이들의 존재가 배위량이 대구를 영남 선교 지부로 정하도록 만든 이유가 있다는 가정이 성립된다. 하나님은 여러 모양으로 그들 이전에 우리 밖의 양들과 같은 존재를 대구에 있게 하셨고 그들은 대구 약령시를 중심으로 비밀 조직과 같은 우리 밖의 양들과 같은 존재로 활동했을 것이란 추론을 가능케 한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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