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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96호]  2018년 5월  2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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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23)
[[제1594호]  2018년 5월  12일]

베어드 선교사, 대구선교사역 출발점

5. 대구제일교회 (8)

 

(2) 1893 4 22 창립설 (3)

대구제일교회 창립일에 대하여 경북노회 100년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1893 4 22 대구에 처음 도착한 베어드는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종로에 임시 숙소를 정하고 선교 활동을 하였다. 이후 경주, 상주, 안동을 비록한 경강북도 일대를 방문하여 지방 실정을 살피는 한편 선교 정책을 구상하기도 했다. 대구제일교회는 이때를 기점으로 대구에 최초의 개신교 교회 역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고 교회의 창립기념일로 삼고 있다.

경북노회는 대구제일교회 창립 문제에서 역사적인 견해를 밝히지 않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중립적인 문장으로 대구제일교회의 입장을 말하는 것으로 입장을 정리한다. 위의 문장은 명확하게 말하지 않고 대구제일교회가 배위량이 대구에 들어온 1893 4 22일을 대구제일교회 창립일로 지키고 있는 입장을 존중하고 있다.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에 대한 문제에서 배위량 기원설로 지킬 것인가 아니면 안의와 기원설로 지킬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대구제일교회와 역사학자들 그리고 경북노회가 연구 논문 발표와 공개 토론회를 통하여 함께 풀어 가야 문제로 본다

박용규는경북 지역에서는 1895 처음으로 선교거점이 마련 것으로 보면서대구 선교의 주역 배위량과 안의와(安義窩 = 아담스, James Edward Adams) 말한다. 그러면서 박용규는 배위량이 1895부산에서 대구로 선교 거점을 옮기면서 대구 지역의 선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로즈(Harry A. Rhodes) 선교 보고서를 받아들인다. 1896 베어드의 보고에 의하면 그는 1895 북장로교 연례회가 끝난 다시 대구와 진주를 방문했을 장차 선교부를 개설할 것을 염두에 두고 울산이 아닌 대구에 217달러를 주고 채를 구입했다.그의 이러한 행동은 개인의 판단이고 결정이었지만, 이런 그의 결정으로 위대한 복음선교의 터전이 이루어졌다. 배위량이 자비로 구입한 대구제일교회 예배당이 있었던 지역은 기독교의 중요한 유적지가 되었고, 그의 후임자들이 구입한 대구 동산은 많은 선교 유적이 있는 기독교 유적지일 뿐만 아니라, 대구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인대구 근대 골목여행의 출발지이다.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1: 1884-1934』대구선교지부 개설한 배위량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재미있는 사실을 전한다.

부산에서 거주하는 4 동안 그는 서울까지 걸어서 여행을 했다. 번은 전주를 경유하여 그곳에서 이틀 밤을 보냈는데, 서울에 도착할 때는 그의 신발이 완전히 닳아 벗겨져 있었다. 부산에서 이같이 빈번하게 순회여행을 행한 결과 대구가 남부 지역의 번째 내륙선교기지 장소로 선택되었다.

대구의 번째 자산은 1895 베어드가 개인적으로 구입한 것인데, 선교부가 나중에 이를 승인하였다. 베어드는 너무 튀어 보이지 않도록 한국 옷을 입었다. 그는 도시의 중안에 있는 기와집을 매입했는데, 나중에 도시의 번째 부지가 되었으며, 교회는 오늘날 남성정교회이다.

당시에 움직이려면 베어드는 미국 공사를 통해 통지하였는데, 대구가 조약상 허용된 개항장이 아니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것이었다. 그것은 위험한 모험이었다.

 

3) 안의와와 그의 동역 선교사들

(1) 안의와

대구제일교회는 미국 북장로교의 대구 선교 역사와 맥을 함께 하고 있다. 대구에 선교사로 처음 발을 디딘 게일은 1889 12 잠시 방문한 돌아가고, 호주 선교사 데이비스가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길에 대구를 방문했지만 선교 사역을 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기에 대구·경북의 본격적인 선교는 베어드 선교사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대구 선교에 기틀을 놓았다고 평가받는 베어드는 미국 북장로교회 전도국의 파송으로 1891년에 입국하여 부산에서 사역하였다. 그는 1893 4 22 경상도 내륙 여행 중에 처음으로 대구에 발을 내딛게 되었다.

배위량이 대구로 함으로써 자연적으로 미국 북장로교의 영남선교지부가 부산에서 대구로 영남선교지부를 옮기게 되었다. 배위량은 1896 1월에 대구에 선교 부지와 집을 자비로 구입한 1896 4 가족과 함께 대구로 이사를 했다. 배위량은 오래 대구에 살지 못하고 그해 10월에 서울 선교부의 교육자문역으로 선임되어 서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배위량의 후임으로 대구 선교지부에 배위량의 처남인 안의와가 오게 되었다. 안의와는 대구 선교지부로 발령받은 부산에서 년여간 한국어를 배우며 준비한 1897 11 1일에 자신의 가족과 함께 대구에 도착했다. 이때 안의와를 돕는 김재수도 함께 대구로 왔다. 김재수는 상주 출신으로 배위량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이미 예수를 믿었던 사람으로 나중에 김기원(金基源)으로 개명하였다. 그는 안의와에게 한국말을 가르치는 개인 교사 역할도 감당했다.

안의와는 대구제일교회의 목사로서 대구 경북지역 최초의 초등학교와 최초의 남자 중학교를 설립한 인물이다. 그는 대구 경북 지역 현대 교육의 선구자로서 근대 문화를 일으키는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가 경상북도 여러곳으로 다니며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이재원은 안의와가직접 설립한교회의 수가최소한 25개에 이르고, 또한 전도 기금을 활용하여 본인 대신 전도인을 파송하여 설립한 교회의 수는 1930 1 현재 경북노회 설립교회수의 25% 이르며, 전도기금에 의해 영구히 운영되는 교회의 수는 73개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이유로 이재원은 한국교회 급성장의 원인 중의 하나인네비우스 전도방법(Nevius Method)으로만 설명할 없고 상당 부분 애덤스의 전도기금(The Adams Evangelistic Fund) 활용으로 설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회사가도 있다.

안의와가 대구로 선교지부를 옮기면서 영남지역 전체를 담당하는 선교지부의 일을 대구선교지부에서 행하도록 했음을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1: 1884-1934』에서 있다. 선교기지의 담당 구역은 한국 땅의 4분의 1 달하지만 인구의 절반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 안에 있다. 문구에서 당시 경상도에 한국 인구의 절반 가까이 살았다는 것을 있다. 그래서사람들이 심한 가난에 처해 있다. 1927년에 교인이 30가정인 시골교회는 모든 사람이 소작인이었고, 이자가 40% 100-200달러의 빚을 지고 있었다 한다.

『미국 북장로교 한국 선교회사 1: 1884-1934』는 안의와가 전한 선교 보고서의 이야기를 아래와 같이 전한다.

아담스(J. E. Adms, D. D.) 목사는 대구에 관해서 그의 글에서 도시가 다섯 가지 점에서 유명하다고 말했다. 예를 들면, 약령시(독일인 상인들은 그곳을 년에 번씩 찾는다), 부채, 사과(크고 빨간 품종), 유기(다른 곳에서는 나지 않는 종류이다), 한국에서 가장 일반시장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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