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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2호]  2018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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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류(靜流) 이 상 근 목사 (117) - Ⅴ. 현장목회자(19)
[[제1588호]  2018년 3월  31일]


창립에 대한 더 깊은 연구 필요

5. 대구제일교회 (2)

 

현재 대구제일교회는 1893 4 22일 배위량이 대구에 들어온 첫날을 현대 창립 기념일로 지킨다. 안의와는 1897 11 1일 아내 넬리 딕(Nellie Dick), 아들 에드워드(Edward), 조사 김재수(金在洙) 등과 함께 대구로 들어왔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안의와(James E. Adams D.D.)가 대구에 들어 온 날과 관련하여 11 1일을 교회 창립 기념일로 지켰다. 이런 일 때문에 대구제일교회의 창립 기념일은 여러 가지 이론(異論)들 때문에 논쟁하게 되고 뜨거운 이슈 중에 하나이지만 여전히 크게 두 가지, 즉 배위량 기원설과 안의와 기원설로 나뉜다.

1896 1월 부산 북장로회 선교부가 현 교회 자리에 42평을 435원에 산 것이 그 구체적인 탄생의 시초가 된다”고 하면서 동시에대구 최초의 선교사 배위량 목사(William M. Baird)를 뒤이어 대구 선교 사업을 개척한 안의와 목사(James E. Adams D.D.) 1898년 그의 자택에서 대구제일교회를 조직했을 때는 안의와 목사, 장인차 의사, 김재수 조사, 서자명, 정완식 학습교인 등을 위시해서 모두 일곱 명에 불과한 교인이었다”고 말하는 위의 글에서 보다시피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자에 대해서 같은 글 속에서도 이와 같은 다름을 보게 된다.

배위량은 경상도 선교지부를 대구에 두기로 최종 결정을 하면서이미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라고 썼다. 그런데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이 언제인가에 대한 학자들 간의 연구와 대화가 필요하다.

배위량은이미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라고 말함으로써 그가 이미 대구에 들어와 정착했다는 것을 말한다. 배위량은 당시 선교사이면서 목사의 신분이었다. 목사인 배위량이 대구에 왔다는 데서 대구 교회의 시초를 찾는 개연성이 아직도 남아 있다. 배위량이 조선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는 열심히 일한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가 단지 미지의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대구를 방문하고 여행했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지만, 그가 다닌 길은 순회 전도를 위한 길이었다. 그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했음을 의미한다. 그가 그런 활동을 했다는데서 교회의 탄생을 찾을 수 있는 개연성은 여전히 중요한 과제이다. 그러므로 배위량이이미 우리가 이 도시에 들어와 일을 시작했다”고 한 말을 대구제일교회 창립과 관련하여 신중하게 고려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그런데 배위량이 부산에 선교 지부가 있는데도, 왜 영남지역 선교 지부를 다시 찾고자 했고, 대구에 그것을 두고자 했을까? 그리고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여 대구에 확정적으로 선교 지부를 두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대구는 그 당시 경상감영(慶尙監營)이 있었던 행정의 중심지였고, 지리적으로도 중심에 위치해 있었고 전략적으로도 중요한 곳 있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배위량이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지지를 받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그가 대구에 처음 발을 들여놓았던 1893 4 22일에 배위량은 약령시장에서 전도하던 중에 어떤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은 전해지지만 그가 과연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혹자는 그 사실을 과장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러나 대구에서 배위량이 세례를 베풀었을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

1928년 기록된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1893년도 부분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부산초량교회가 성립하다. 선시에 미국북장로회 선교사 배위량 부부가 영서현에 내주하고 그 후에 하대 의사 부부가 역래하여 동시 전도함으로 신자가 점기하고 시년에 선교사 손안로가 초량(현금 예배당기지)에 내주하여 교회를 설립하니라. (그 후에는 손안로가 마산에 이주할 시에 영서현교회와 병합하였고 예배당을 영주동에 이전하니라.) 是時에 선교사 배위량은 釜山으로부터 大邱에 이주하야 해처(該處)를 동도(同道)의 중심지를 삼아 열심히 전도함에 신자가 점진하여 敎會 基礎成立되였난대 서두찬(徐斗燦)이 처음 세례를 밧앗나니라

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대구지역 교회의 기초가 1893년 성립된 것으로 본다. 배위량에게 서두찬(徐斗燦)이라는 사람이 대구에서 처음 세례를 받은 것으로 전한다. 1893 4 22일에 대구에 들어 온 뒤에 배위량이 복수의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서두찬(徐斗燦)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 더 이상  알려진 것은 아직 없다. 그것은 그에 대한 기록이 없어 아직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이재원은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의 기록을 허구(fiction)로 생각하고 부정한다.

필자는 성서학자이지 교회사가는 아니다. 단지 역사를 좋아했다. 어릴적 역사책 읽기를 좋아했고 신학교 다닐 때는 역사 공부가 재미있어 수업을 자주 찾아갔다. 독일 튀빙엔 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필자의 박사학위 지도 교수의 교수직은 신약성경과 초기 유대교뿐만 아니라, 쿰란-에세네 그리고 그리스-로마사까지 담당하는 계열이었다. 독일서 신학을 공부할 때도 필자는 해야 할 분야가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할 때 보았던 분야 보다 훨씬 넓어 매 학기 신약성서 과목뿐만 아니라, 구약 과목 수업을 구약전공자와 함께 공부해야 했고 초기 유대교나 초기 교회사 등을 공부하지 않으면 논문을 쓸 수가 없었다.

처음에 귀국해서는 학술대회에서 구약 논문도 발표했고 교회사 학회에서 정회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 생활은 그런 다양성이 존중되지 않아 신약 성경 쪽으로만 공부하고 연구하는 분위기이고, 더욱이 서울서 대구로 이사 온 후부터는 역사학회 쪽에 거의 활동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정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다보니 정류를 바르게 이해하기 위하여 역사책을 다시 펴야 하는 피치 못하는 경우가 발생했다. 정류를 연구하다 배위량을 만났고 그가 순회 전도했던 여행길을 찾기 위해 걷다보니 그에 관한 역사책도 읽는 일도 많아졌다. 이런 일로 하는 수 없이 이 책 저 책 역사책과 역사 논문을 뒤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래서 정류를 연구하는 지금 쓰여진 글의 부피로는 신약에 대한 연구가 많지만, 매주 하나씩 기고하는 정류에 관한 글이 대부분 역사에 관한 기록이기에 수적으로는 역사에 관한 기록이 신약성서에 관한 글보다, 훨씬 더 많다. 그렇지만 여전히 역사적인 안목이 부족한 상태이다. 이런 부족한 상태에 있지만, 대구지역 교회사의 태두(泰斗)와 같은 이재원이 왜 좀 더 대구제일교회의 창립과 관계된 문제를 파고들지 않고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의 기록을 허구(fiction)로 생각하고 부정했을까 하는 아쉬움을 가진다. 그래서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는 朝鮮예수敎長老會의 역사(歷史) 기록이므로 야사(野史)가 아닌 정사(正史)인데 이재원과 그를 존경하는 대구의 역사가들이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를 너무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 문제를 좀 더 거론하고 무언가를 해야 할 당위성을 찾는 연구자들이 나타나기를 희망한다

배재욱 교수<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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