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신문
뉴스오피니언교양피플미션말씀특별기고 | 지난연재물
[제1602호]  2018년 7월  14일
기사검색
전장연 총회 교단 교계 동정 연합기관행사일정 특별기획 포토에세이
장로열전
빛을 남긴 선진들(목사/장로)
노마트톡
통일밥상
통일로 가는 길
한국교회비사
이슬람과 한국교회
Home > 미션 > 빛을남긴 선진들(목사/장로)
[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27)
[[제1598호]  2018년 6월  9일]

비기독교인에게 복음 전하려 노력!

5. 대구제일교회 (12)

 

3) 안의와와 그의 동역 선교사들 (5)

이재원의 논문에 따르면 안의와(Rev. James E. Adams) 출생, 신학 수업 그리고 결혼은 아래와 같다.

1867 미국 인디애나(Indiana) 맥코이(McCoy)에서 출생했다. 그는 1888 캔자스(Kansas) 터피커(Topeka) 워쉬번 대학(Washburn College) 졸업하고, 그후 1년간 홉킨스 대학(John Hopkins Universiity)에서 수학했다. 그는 목회자가 되기 위해 맥코믹신학교(McCormick Theological Seminary) 들어가 1894년에 졸업했다. 졸업 목사안수를 받고 터피커(Topeka) YWCA 간사로 일하던 Nellie Dick 양과 결혼했다. 같은 그들은 미국 북장로회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고 부산선교지회에 배속받았다.

안의와의 한국 선교사로 출발은 매형 배위량의 충고를 따라 한국말을 배우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부산에는 이미 안의와의 매형인 배위량과 누나인 안애리(安愛理, Mrs. Annie Laurie Baird)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안의와와 안의와의 부인은 1895 5 29일에 부산에 도착했다. 배위량은 부산에 와서 부산 선교지부를 새로 세우고 터를 넓히는 사역을 위하여 영남 지역 여러 곳을 다니면서 개항지가 아닌 영남 내륙 지방에 선교 지부를 개척하고자 노력했다. 그는 여러 번의 순회 전도 여행을 통하여대구가 경북지방 선교에 가장 좋은 곳이라는 결론을 얻고 선교부에 선교지부 설치 청원서를 제출했다. 청원서는 1895 11월에 승인이 났지만 내용은 부산선교지부의 감독을 받는 내륙지부(Inland Station)로서 허가한다는 것이었다. 

안의와가 부산 선교지부에서 선교지 적응 훈련을 받는 동안 배위량은 대구선교지부 설치 승인을 받았고 대구에 선교지부 터를 구입하였다. 1895 12 대구로 올라와 한복을 입고(소문나지 않게) 쓸만한 부동산을 물색했다. 다음 1896 1월에 적당한 부동산을 발견하고 계약을 맺었다. 이것이 현재 남성로 약전골목에 있는 제일교회의 부지이다. 배위량은 같은 4월에 식구(부인과 아들) 데리고 집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배위량 부부는 대구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같은 11월에 서울지역 교육담당 고문으로 전근을 갔다. 그리고 대구선교지부 사업은 그의 처남인 안의와 목사에게 인계했다.

배위량이 서울로 떠나기 전에 안의와는 대구에 와서 배위량으로부터 대구선교지부의 업무를 인계받았다. 하지만 그는 대구선교지부로 즉시 취임하지 않고 부산으로 내려가 배위량이 만든 어학원에서 한국말을 1년간 배웠다. 안의와는 후에 안의와가 대구로 들어 왔다. 이재원은 안의와 일행이 대구에 들어 날을 대구제일교회의 창립일임을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1897 11 1 부인 Nellie Dick, 아들 Edward(안두화), 그의 어학선생 조사인 김재수(일명 김기원), 그리고 해산할 부인을 도와줄 임시보모 Marie Chase 양을 데리고 대구에 왔다. 이들 일행의 대구 도착을 대구선교지부 보고서는애덤스 박사는 대구에 도착한 지체하지 않고 즉시 선교기지 안에 있는 사랑에서 예배드리기 시작했다라고 기록했다. 날의 사건 속에는 교회 설립에 필요한 요건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다. 첫째, 예배를 인도한 목사가 있었다. 둘째,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이 있었다. 셋째, 지속적으로 예배드릴 있는 고정건물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에 근거해서 대구제일교회는 1897 11 1 안의와 목사에 의해 창립되었다고 주장할 있다. 안의와 목사 일행이 대구선교지부에 부임한 날은 대구제일교회가 창립된 날이 되었던 것이다

안의와는 결혼했고 첫째 부인 넬리 (Nellie Dick)과의 사이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장남 Edward 1895 2 6일생 캔사스 터피커, 차남 Benjamin 1898 1 14일생 대구, 장녀 Dorothy 1899 11 2일생 캔사스 터피커, 삼남 George 1907 8 6일생 대구.첫째 부인 넬리 딕은다섯 번째 아기가 유산된 산후불순으로 1909 별세했다. 그의 유해는 동산의료원 외국인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안의와는 첫째 부인 넬리 딕을 잃은 3 후에대구선교지부에 근무한 있는 Caroline Bobcock 양과 재혼하여 슬하에 남매를 낳았다. 사이에사남 Henry 1916 7 1일생 대구, 차녀 Mary Elizabeth 1914 6 19일생 평양 자녀를 두었다.

이재원은안의와 집안의 전도 기금(The Adams Evangelistic Fund)이란 소제목으로 안의와의 선교적인 공로를 서술한다. 그런데 기금이안의와 집안의 전도 기금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은기금의 창시자인 안의와가 대부분의 돈을 놓았기 때문이 아니고 그의 지칠 모르는 열정과 굽힐 모르는 끈기가 여러 곳에서 돈을 모아 사업을 가능하도록 만들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이재원은 안의와를 1897년부터경상북도에 정착한 번째 선교사 칭하면서, 그의 번째 노력은 비기독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그의 노력을 번성케 만들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왔다. 기독교 후원자들이 급격히 증가해 병원이 설립되고, 보이스 아카데미(계성학교) 걸스 아카데미(신명여학교) 개교했다 했다.  

이재원은 안의와가 너무 많은 일로 그의 건강이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는 등을 아래와 같이 기술한다.

얼마 번째 선교지회가 안동에서 설립되었다. 모든 사업이 1910 경까지 정상적이며 건전한 방법으로 발전했다. 조직적인 사업의 영역이 너무 방대하여 선교사들은 일에 모든 시간을 바쳐야 했기 때문에 직접적으로 설교(전도) 시간은 거의 없게 되었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해마다 새로 추가된 교회의 수는 급격히 감소되었다. 1915년부터 1920년까지 새로 추가된 교회의 수는 별로 없었다. 인구 1,000 5 내지 6명만이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에덤스 박사에게는 점점 높아지는 경고가 되었다.

건강의 악화 때문에 미국으로 돌아가야 필요가 생겼다. 1918년에 그는 사임했다. 건강이 약간 회복되어 그는 남은 일생을 경상북도의 비기독교인들의 구원을 위해 바치기로 결심했다. 그는 미국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계획에 흥미를 갖게 있었다. 그리하여 목적을 위해 많은 돈을 모금했다. 돈을 가지고 그는 독립 선교사로서 한국에 돌아왔다.

그러나 그의 건강상태로서는 다른 선교사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동정하고 시간을 주는 외에는 별로 것이 없었다. 1924 건강이 다시 악화되어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번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것이 확실했다. 그는 사실을 깨닫고 선교사가 되어 선교 일선에 돌아온 아들에게 그의 모든 기금을 인계했다. Rev. Ben N. Adams 안동 스테이션을 담당하고, 대구 스테이션은 장남 Edward Adams 맡았다. 1924 이후 사업은 위의 사람의 관리하에 있었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 저작권자 ⓒ 장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저작권문의
이번호 많이 본기사
타락한 천사, 사탄, 루..
기드온의 ‘금 에봇’
59. 초락도 금식 기도..
147. 철종의 가계도 ..
<94-총회총대5>
332. ‘기도합니다’와..
“사나 죽으나, 선하게 ..
<94-총회총대4>
331. ‘고범죄’에 ..
박래창 장로(전국장로회..
만평,만화
햇볕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동역자 된 장로들, 빛.....
44회 전국장로수련회 - 영적 충.....
공지사항
[정기휴간]5월 10일자
[9월 28일자] 추석연휴 휴간..
회사소개구독신청 지사 Contact Us Site Map

한국장로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 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청소년보호책임자: 이승담 | Copyright (c) JANGR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