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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정류(靜流) 이상근 목사 (128)
[[제1599호]  2018년 6월  23일]

경북에 50여개 교회 세운 부해리 목사

5. 대구제일교회 (13)

 

3) 안의와와 그의 동역 선교사들 (6)

안의와의 경상북도 전도는 상당한 울림을 주었다. 이재원에 따르면 그가 이룬실제적인 사업 대부분토착 전도인들이 대부분 수행하였다. 한때는 25명에서 30명이 고용되었다.전도인들은추수할 마을을 찾아내기도 하고, 매우 드문 경우이지만 마을에서 사람의 개종자를 얻지 못하는 곳도 있었다. 마을에서는 75% 이상이 충분히 교회라고 부를 있는 집단을 형성하기도 했다.

안의와가 설립한 복음전도 기금은 경상북도 안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서명원(Ray E. Shearer) 저술하고 이승익이 번역한 韓國敎會成長史(Wildfire : Church Growth in Korea) 보면 전도 기금이 이룬 놀라운 결과를 있다. 서명원은 경상북도에서 교회 성장이 타지방에 비해 컸던 이유를자급 자족의 원리로 하는 Nevius 전도방법을 지켰기 때문이 아니고 오히려 그것을 무시했기 때문이라고 역설하였다. Adams 복음전도 기금은 재정적으로 자립할 없는 교회들을 크게 도와주었던 것이다라고 보았다.

안의와는Nevius 원리 무시하는 전도방법을 사용하여 경상북도 안에서 놀라운 전도의 결실을 맺었다는 사실을 서명원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1930 이전 10 동안에 기금의 후원으로 72 교회가 세워졌는데 대체로 그것은 당시에 경상북도에 있던 전체 교회 수의 15% 해당하며 대구를 포함한 경북노회의 교회 총수의 25% 해당되는 숫자이다.

서명원은 또한 경상북도의 전도의 결실을 나름대로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1930년에 대구지부의 보고에 의하면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킬만한 환경적 요인이 별로 없었지만 교회는 복음의 선포를 위한 태세를 갖추고 있었으며, 교회가 인구 증가에 따른 수요를 미쳐 충당하지 못한 유일한 이유는 지도자의 부족 때문이었다고 한다. 비록 수는 적을지라도 교회에 훈련을 받은 지도자가 사람씩 있었더라면 우리는 성장하고 자랄 있었을 것이다. 만일 지도자들이 있었더라면 약한 교회들도 성장했을 것이며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질 있었을 것이다. 1931년에는 이전 30 동안에 닦아진 터전 위에서 교회가 놀라울 비율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서명원은 대구선교지부의 보고서를 분석하면서 경상북도 전도를 촉진시킬 만한 특별한 방법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성장한 원인을 안의와가 네비어스(Nevius) 전도 방법을 적당하게 무시하면서 전도 기금으로 교회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보면서 아래와 같이 정리한다.

충분한 반론의 근거가 발견될 때까지는 때에 이루어진 성장이아담스 복음전도기금' 의하여 세워진 교회들의 확장이었다고 필자는 믿고 있다. 그러한 교회들은 외국의 돈으로 세워졌지만 그러나 머지 않아서 외국기금으로 성장하는 테두리 안에 제한을 받지 않고 스스로 발전할 있도록 방임되었다. 아직 필자가 알지 못하는 다른 요인들이 그때 지역의 교회에 깊은 영향을 끼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요인들이 발견될 때까지는 네비어스의 원리를 현명하게 무시한 것이 지역에서 놀라운 교회 성장을 가져오게 되었다고 있을 것이다.

이재원은 부해리(傅海利, Henry Munro Bruen) 대하여서도 연구하였다.

부해리 목사(Rev. Henry Munro Bruen) 1899 10 26 대구에 와서 특히 경북 서부지방(김천선산고령성주칠곡 등지) 최소한 50개가 넘는 교회를 설립했다. 그는 1899 대구 선교지부에 부임한 1941 일제에 의해 강제 추방당할 때까지 40년을 넘게 오로지 대구경북에서만 선교했다. 그는 대구 주재 선교사들 어느 누구보다도 한국말을 잘해서(한국말로 설교를 유창하게 정도) 한국인 교인들은 그를 외국인 선교사가 아닌 한국인 목사처럼 편하게 대할 있었다. 그는 제일교회와 남산교회를 담임했고, 경상노회장과 경북노회장을 역임했다. 그가 설립한 교회 중에는 역사가 이미 100년을 넘어선 곳도 있고, 2-3년만 지나면 100년이 교회도 숱하게 있다. 이들 교회 중에는 지금 교회 창립행사는 물론 교회 100년사 간행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하지만 설립자 부해리 목사는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어디에서 교육을 받았고, 언제 선교사가 되어 대구에 왔느냐 등과 같은 극히 기본적인 사항은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다. 필자는 이러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고 부해리 목사에 관한 신상 기록을 그의 부인이 자료집 <한국에서 40>(40 Years in Korea) 토대로 하여 여기에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한국식 이름이 부해리가 사연과 부해리 이름의 정확한 한자 표기를 밝히고 끝으로 그가 설립한 교회들을 통계적으로 정리해 보려고 한다

1874 미국 뉴저지 써밋(New Jersey Summit) 중앙장로교회 초대 목사인 제임스 디하트 브루언(James DeHart Bruen) 둘째 아들로태어난 부해리는목사였던 할아버지 제임스 맥워르터 브루언(James McWohrtor Bruen) 아버지 제임스 디하트 브루언(James DeHart Bruen) 이어 3대째 목사가 되었다. 부해리 1899 5 1일부로 안의와(安義窩) 장인차(張仁車) 이어 번째 선교사로 임명받아 그해 10 26일에 대구에 도착했다. 부해리가 대구에 부임함으로 인하여 대구선교지부는 서울 부산 평양에 이어 미국북장로교 한국선교회의 번째 공식적인 선교지부가 되었다.

이재원은 부해리란 한국식 이름이 나오게 배경을 아래와 같이 전한다.

부해리 목사가 처음 대구에 왔을 선임 선교사인 안의와 목사(Rev. James E. Adams) 그에게 한국에서 선교하려면 한국 이름을 갖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다. 그래서 부해리 목사는 그의 어학 선생인 이내경 장로와 안의와 목사 셋이서 한국식 이름을 상의했다. Bruen ()이고 Henry 이름()이다. 미국에서 Henry 애칭은 Harry이다. 그러므로 미국 이름 Harry Bruen 한국 이름으로 고치는 것이 문제였다. 그런데 한국 이름은 미국식과는 반대로 성이 먼저 나오고 이름이 뒤에 나온다. 결국 Bruen Herry 한국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숙의(熟議) 끝에 미국 이름과 발음이 비슷한 한국식 이름으로 선택된 것이 부해리가 되었다. 부는 스승 () 정하고 해리는 바다 (), 이로울 () 정했다. 영어로는 teacher, sea, gain이라고 뜻풀이를 했다. 이렇게 해서 브루언 목사의 한국 이름은 부해리가 되었으며 한자 표기는 부해리(傅海利) 확정되었다.

따라서 곽안련의 <한국교회사 전휘집> 傅海理(185), 차재명의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 > 傅解理(286), 이상근의 <대구제일교회90년사> 傅海里(64) 모두 표기가 한두 글자씩 틀리는 것이다. 간혹 부해리 목사의 성을 부할 () 자로 쓰는 경우도 있으나 이것 역시 잘못이다.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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