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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14호]  2018년 10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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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로]믿음의 선진, 삼형제이야기 오윤선•오형선•오원선 장로 (4)
[[제1609호]  2018년 9월  8일]


평생지기 동역자들과 함께 한 민족운동

■ 귀향

아무리 가난한 벽지라도 고향은 고향이라 하였거니, 타향에서 어렵고 외로울 때는 절절히 그리워하던 고향이 아니었던가?

오윤선은 35세 나이로 깊은 감회에 젖어 1906년 고도 평양에 돌아왔다. 고향을 잊고 산 지 여러 해, 어린 날 정들이고 다니던 배움터 서당이며, 놀이터 그리고 가족 친구들, 의구(依舊)한 산천이며, 다정한 풍물들 모두가 정다웠다.

평양에 돌아온 오윤선은 우선 고향의 가족들과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만나 지난 이야기로 꽃피우는 일을 시작으로 고향에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하였다.

먼저 헤어질 때 아우 형선이 간곡히 당부하던 말이 마음에 담겨 인근에 있는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이 산정현교회에서 조만식, 김동원 등을 만나 평생지기로 믿음 가운데 민족운동을 함께 하게 된다. 청년계에 있어서는 조만식, 사회사업에 있어서는 김동원, 자선사업이나 교육사업에 있어서는 오윤선이 나누어 맡는 자리매김으로 31운동 이후 평양 교계와 사회에 민족의 샛별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평양 YMCA가 김동원 장로를 중심으로 조직되자 조만식은 총무로 선임되고 오윤선도 일원으로 참여하여 대동문 안에 자리잡은 한식 2층 기와집회관에서 민족 청년운동의 산실, 평양 기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물산장려운동, 신앙운동, 농촌운동을 전개하며 민족운동의 정신적 보루로 함께 활동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충고대로 토산물위탁사업을 시작하였는데 차츰 번성하게 되고, 1920년에는 물산장려운동과 더불어 무명으로 만든 두루마기와 모자가 널리 애용되면서 오윤선이 경영하는 광신상회가 호황을 누리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계리에 마당과 방들이 널직한 집을 마련하였고, 평안무역주식회사 감사, 상업회의소 평의원, 평양상공협회장 등 광범위하게 활동하였다.

주위의 소개로 결혼하게 되었고, 슬하에 3남매를 두었으며 그 막내는 1916년에 출생한 아들 오영진이다. 계리는 덕전골이라고도 불렸는데 오윤선의 집 앞은 전차가 다니는 종로거리였다.

 

  산정현교회

산정현교회는 장대현교회와 함께한국의 예루살렘’이라 불렀던 평양의 장로교회를 대표하는 교회였다. 평양의 장로교회는 1839년 마펫 선교사가 대동문 안널다리골' 판동에 교회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1903년에 남문밖교회, 1905년에 창동교회가 설립되었고 1906 1 7일에는 평양의 네 번째 장로교회로 산정현교회가 설립되었다.

교회가 창립될 당시 교인은 장대현교회와 남문밖교회에 다니며 예배하던 137명이었으며 석달 만에 주일 예배 참석자가 200명을 넘게 되었다. 처음 예배 장소는 장대현교회와 남문밖교회의 첫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던 대동문 안의 마펫 선교사 사택 건물이었다. 그러나 그 지역이 평양의 변두리였기에 교회를 시내 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1907년 마펫 선교사의 도움으로 마련한 곳에 예배당을 건축함으로 이때부터산정현교회'로 불리었다.

목회자로는 변해슬 목사가 설립 초기부터 맡아 10년 동안 봉직했고 한국인 목회자로는 1913년 한승곤 목사, 1916년 안봉주 목사에 이어 1917년부터 강규찬 목사가 부임하여 15년간 봉직하였다. 교세도 꾸준히 증가하여 1917년 당시 교인 총수가 6백여 명에 달했고 주일 평균 출석은 4백 명 정도였으며, 1929년에 이르러 장년 8백 명, 유년 4백 명, 도합 12백 명 교세를 기록하였다. 산정현교회는 1918년 공동의회에서 오윤선을 집사로 선출했으며, 그 후 안수집사로 장립받았다.

강규찬 목사는 평양 산정현교회를 목회하는 동안에 그는 1919 3.1운동을 온몸으로 겪으며 기독교 민족운동의 선봉에 섰으며, 그의 영향으로 산정현교회를 통해 조만식, 김동원, 김선두, 오윤선, 김예진 등 많은 민족지도자들이 배출됐다. 강규찬은 3.1운동으로 옥고를 치른 후에는 조만식을 비롯한 산정현교회 교우들과 함께 물산장려운동의 저변확대에 힘쓰는 한편 기독교학교운동에도 깊이 개입해 개교회로는 처음으로 유치원을 설립했으며, 평양에 숭인학교를 비롯한 교육기관을 설립하는데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조만식 장로는 한국의 독립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의 교육자종교인언론인시민사회단체인정치인이다. 22세에 개신교에 귀의한 후 상업과 종교활동에 종사하다가 1919 3.1만세운동과 중국 출국실패 등으로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오산학교에서 교사와 교장으로 교편을 잡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 교육활동과 물산장려운동국내민간 자본으로 대학설립 추진운동인 민립대학 기성회 운동, YMCA 평양지회 설립, 신간회 등을 주도하였다. 1945 8 15일 민중들의 지지와 호응을 받아 건국준비위원회 평남지역 위원장에 참여했고, 11월에는 한국 최초의 개신교 정당인 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초대 총재를 지냈다. 1945 12월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다가 1946년 평양 고려호텔에 감금된 뒤 한국 전쟁 중 김일성 측근 세력에 의해 살해되었다.

김동원 장로는 1911년 조선총독부가 조작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13년 석방되었다. 이후 1920년대 조만식 등과 물산장려운동을 추진하였다. 이후 수양동우회에서 활동하다가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이 일어나자 다시 투옥되었다. 투옥 후 친일 행각에 앞장서게 되었고, 석방 후 태평양 전쟁을 위한 항공기 헌남 운동 및 학병 권유 논설 작성 등의 친일 활동을 하였다. 8.15광복 후에 평안남도 평양부에서 조만식과 함께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평안남도준비위원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소련군이 북한에 입성하자 월남하였다. 이후 미군정 장관의 행정고문에, 신탁통치 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 위원, 한국민주당 상임위원 및 기획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국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용산구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어 국회 부의장을 역임했다. 그러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납북되었다.

오장은 장로<새문안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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