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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0.민족 운동가인 도인권
[[제1560호]  2017년 8월  5일]

도인권(都寅權, 1880-1969)은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 하오리 전호동에서 출생하였으며, 어려서부터 엄격하고 예절 있는 생활교육과 한문교육을 받았다. 불행하게도 그가 한참 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할 10살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때 마을 이장이 마을 장으로 장례예식을 거행해야 한다는 여론을 수렴하여 장례예식을 성대하게 거행했다.

아버지를 잃고 난 도인권은 14세에 평양으로 이주를 하였으며, 1901년 구한국 군대 육군군사 특별과(무관학교 군사특과)에 입대하여 모든 과정을 이수한 후 하사관 간부 훈련교관으로 임관을 하였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황해도 재령의 양원학교를 중심으로 <학무회=學務會>를 조직하고 교육사업에 투신하였으며 1908년 고향인 용강에 충일학교와 사범강습소(師範講習所)를 설립하고 새로운 교육사업을 진행하였으며, 재령 문창학교 교장을 역임하였다. 또한 안악에 있는 양산학교에서도 근무를 하였다. 이때 기독교에 입교하여 1910년 안악 장로교회에서 선교사 밀러(Rev. F. S. Miller/閔老雅)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고 즉시 청년 전도 대를 조직하여 전도사업을 실시하였다.

1911 2월 안명근 사건에 관련되어 김구, 김홍량 등과 함께 일본 고등계 경찰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과 악형(惡刑)을 당하였으며, 6년간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獄苦)를 치르었다. 그가 감옥에 있을 때 일본 경찰관이 불당(佛堂)을 건축하여 입불식(入佛式)을 거행하면서 모든 죄수들로 하여금 분향배례(焚香拜禮)하게 한 적이 있는데 그 혼자만 예수를 믿는다고 이에 불응을 하여 수없이 구타를 당하기도 하였다. 가출옥 조처에도 출옥시키지 않으면 나가지 않겠다고 고집하여 형기를 다 채우고서야 풀려났다. 이를 김구는 <백범일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사람됨이 민활하고 강직하다. 10년 징역형을 선고받고 노역하는 중에 야소를 돈돈히 믿었는데 왜놈 교회사(敎誨師)가 일요일 불상 앞에 각 수인(囚人)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고 예불(禮佛)하도록 명하니 수인들이 마음속으로는 천황(天皇) 급살을 빌면서도 겉으로는 머리를 숙였으되 수백 명 가운데 도인권 한 사람만이 머리를 까딱 안 하고 앉았다. 간수가 질문을 해도 도는 자기는 기독교 신자 이므로 우상에 절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놈들이 분이 나서 도인권의 머리를 억지로 타 누르거니, 도는 눌리지 않으려거니 대소동이 일어났다. 도는 <일본 국법에도 종교의 자유가 있고 감옥 법에도 수인(囚人)들이 불교만 신앙하라는 조문이 없는데 어디에 근거하여 이같이 무례한가 ? 일본인의 안목으로 보아 도인권 이가 죄인이라 하나, 신의 안목으로는 일본인이 죄인이 될지도 모른다” 하여 큰 시비가 생기어서 급기야 교회사(敎誨時)에 배불(拜佛)하는 일 만큼은 수인(囚人) 자유에 맡긴다는 전옥의 교사가 있었다. 그 후에 소위 가출옥을 시키는 데도 <나의 죄가 없는 것을 지금에야 깨달았거든 판결을 취소하고 아주 풀어 줄 것이니 가출옥이란 가() 자가 정신에 상쾌치 못하니 기한까지 있다가 나간다” 한즉 왜놈도 어찌할 줄을 모르고 기한을 채워서 방면(放免)을 하였다.>

1919년 평양에서 교회를 중심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후 7월에 상해에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 군무국장, 무관학교 교관, 학도대장, 임시의정원 부의장, 상해 거류민 단장, 교포학교인 인성학교 교장 등을 역임하였다. 1921년에는 고려혁명위원회 33인 중의 일인으로 시베리아로 가서 공산주의자들과 대결하였다. 한편 1922 10월 남감리교회에 속해 외수청(外水淸)구역을  담임하는 것으로 교역을 시작하여 시베리아 지방의 선교사업에 투신하였다. 1929년 소련 공산정권의 종교 핍박을 피해 교인들과 함께 중국 훈춘의 동흥진으로 피하여 여기서 6개의 교회와 5개의 학교를 설립하는 한편 동흥진교회의 담임으로 시무하면서 영육 상으로 큰 성과를 얻었다.

1931년 만주사변 당시에는 비적들에게 잡혀 사형선고까지 받았다가 석방된 적도 있었다. 이때 일본인 토벌대장이 교회당을 지켜 주었으며, 심지어 무너진 교회당을 신축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 도인권 목사가 동흥지방을 떠나는 전별 상황을 <조선감리회보>에 보도를 하였다. 만주사변 당시 도인권 목사는 비적에게 잡혀가 사형선고까지 받았으나 환란과 핍박 중에도 꾸준히 구령사업에 분투하여 그간에 800여 명이나 되는 신자를 얻기도 하였다. 실로 도인권 목사의 선교사역은 큰 힘이 되기도 하였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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