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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2.임시정부의 초석을 다진 이동녕 열사
[[제1562호]  2017년 8월  26일]

이동녕(李東寧, 1869-1940) 충청남도 천안군 모천면 동리에서 경상북도 의성군 군수(郡守) 영해 부사(副使) 역임한 이병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이동녕은 어릴 때부터 매우 머리가 총명하여 10살이 되었을 때에 사서삼경을 통달하였다. 1892 4월에 24세에 국가시험인 응제진사(應製進士) 지원서를 제출하고 여기에 응시하기 위해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여 합격하였다. 이동녕은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망국의 현장을 눈으로 보고, 나라를 찾겠다는 굳은 의지를 갖고 1896 독립협회에 가담하였으며, 2 후인 1898 독립협회 사건으로 이준, 이승만 등과 함께 경성 형무소에 투옥되어 7개월간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1902 이동녕은 이상재, 전덕기 등과 함께 YMCA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04년에는 1 한일협약 체결 서울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중심으로 결속한 서울 상동청년회에 가입하였으며, 김진호, 양기탁, 이희영, 이시영, 등과 함께 민족 계몽운동을 벌였다.

1905 11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서울 상동교회에서 결사대를 조직하고 서울 중심지인 대한문 앞에서 무효상소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2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이동녕은 출옥한 북간도(北間島) 떠났다. 그는 이상설, 여준, 정순만, 박무림 등과 함께 용정(龍井)에서 서전서숙(瑞甸書塾) 설립하고 교포 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이동녕은 1907년에 귀국해 4월경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 유동열, 안창호 등과 함께 신민회를 조직하고 중앙회 총서기로 활동을 하면서 자매단체인 청년학우회 총무로도 활약을 하였다. 또한 대성학교와 오산학교를 설립하였으며, 서울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재직하였다.

1909 양기탁의 집에 모인 신민회 간부들은 국내 항일운동의 한계를 느끼고 2독립운동기지 건설과 독립군 양성을 위해서 일을 해야 한다면서 결의를 하였다. 결의에 동참했던 이동녕, 이희영, 주진수, 장유순 등이 중국 만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근거지를 물색하고 돌아오기도 하였다. 1909 10 안중근은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려고 노력해 이토 히로부미 (伊藤博文) 사살하였다. 일로 조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자 신민회는 해외와 국내로 나뉘어 투쟁하기로 결의를 하였으며, 1910 1911 초까지 그를 비롯한 이희영 6형제, 이상룡, 김창환, 여준 1백여 명이 가족들과 더불어  만주 요령성 유하현 삼원보 추가가에 망명을 하였다. 1911 4 항일독립운동 단체이자 한인교포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耕學社) 조직하고 부속기관으로 신흥강습소(新興講習所) 개설하였다.(얼마 후에 통하 합니하에 교사를 신축하고 이전을 하였다.) 이동녕은 신흥강습소 초대 소장으로 취임을 하였으며, 독립군 양성과 교포 교육에 매진하였다.

또한 안동식, 이윤옥, 김창무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매주일 예배를 드리다가 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회가 만주 유하현 삼원보교회였다. 1913 일제는 형사대가 파견되었으며, 피하라는 연락을 받고 독립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이상설 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 권업회(勸業會) 참여를 하였다. 권업회에서는 <권업보>, <해조신문> 발행하는 교포들의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왔었다. 무렵 민족종교인 대종교(大宗敎) 입교하였으며, 1914년에는 이상설과 군관학교를 설립하던 탄로가 관에 체포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루기도 하였다. 이후 그는 만주와 노령에서 이희영, 이시영, 황공달, 문창범, 황상규, 이범윤, 김좌진, 박찬익, 윤세복, 김동삼, 여준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9 3.1운동 직전인 1월에 무오독립선언서를 내외에 선포하였다.

1919 3월에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에 가담하여 4 10 임시의정원 초대 의장으로 추대를 받았다. 얼마 후에 국무총리 대리 내무총장이 되어 임시정부의 기초 작업을 착수하였다. 정부의 기구가 확고해지자 그해 10 <상업에 종사하는 동포>에게와 <남여 학생들에게>라는 제목의 밀서(密書) 국내에 발표하였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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