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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6.독립운동가 최성모
[[제1568호]  2017년 10월  21일]

최성모(崔聖模, 1874-1937) 독립운동가로서 서울 종로구 안국동에서 출생하였다. 일찍이 부모의 교육열로 어린 나이였지만 한문서당에 입학하여 한문을 배우기 시작하였고 이것이 인연이 되어 한학에 매진하였다. 최성모는 1888 14세의 어린 나이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고 합격하였다. 발표가 있는 최성모의 집에서는 며칠 동안 잔치가 벌어졌다.

1905 을사조약(乙巳條約) 이후 어지러운 나라 정세가 계속될 즈음 그는 절친한 친구 이필주(李弼柱) 함께 우연히 서울 상동교회 앞을 지나다 교회 입구에 걸려 있는 <시국강연회=時局講演會> 포스터에 이끌려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서울 상동교회 안은 발을 디딜 없을 정도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여기서 전덕기 목사의 강연을 듣고 감화를 받았으며, 여기서 비로소 마음의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다. 강연을 하고 있던 전덕기 목사는 청중을 향하여사랑하는 시민 여러분, 나라가 이렇게 어려울 때는 가만히 강연만 듣고 있을 것이 아니라,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같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해야 합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모든 청중들은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최성모는 길로 귀가하여 배재학당에 다니는 아들을 불러 가위를 자져 오라고 하고 직접 소중하게 여겼던 상투를 잘라 버렸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상투 머리를 제가 가위로 잘라 버렸습니다. 저는 내일부터 서울 상동교회에 출석을 하겠습니다.이때 청중들은 최송모의 행동에 놀라고 말았다.

이렇게 해서 최성모는 서울 상동교회에 다니게 되었다. 6개월간 열심히 다녔던 최성모는  학습을 받아야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길로 학습 받을 준비를 하고 교회에서 실시하는 학습문답을 받고 학습 교인으로서 신앙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는 주일이 되면 아침 일찍 교회에 출석하여 항상 앞자리에 앉아 괘도에 걸려 있는 찬송가의 가사를 보고 열심히 찬송을 불렀다고 한다. 그때 그가 즐겨 불었던 찬송가 가사를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합동찬송가 403)

1 : 위하여 십자가의 중한 고통 받으사 / 대신 죽은 예수의 사랑하신 은혜여 / 보배로운 피를 흘려 영영 죽을 죄에서 / 구속함을 얻은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2 : 예수 안에 있는 우리 한량없이 즐겁고/ 성령의 위로함이 마음속에 차도다 / 천국 음악 소리 같은 은혜로운 말씀 / 끊임없이 듣는 우리 어찌 찬양 안할까

3 : 세상의 모진 풍파 쉬지 않고 불어도/ 주님 안에 보호 받는 우리 마음 편하다 / 깨어서 기도하고 천국을 바라며 / 주님만을 기다리니 어찌 찬양 안할까.

최성모는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면 목사의 설교를 노트에 필기하여 집에 가서도 읽어 보는것 뿐만 아니라 은혜를 받으며,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내용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전덕기 목사의 지도를 받으면서 신앙에 매진하다가 신민회 회원으로도 활동을 했으며 여기에 YMCA 간부로도 크게 활동하였다. 그는 신학을 해야 제대로 선교 할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서울에 있는 협성신학교에 진학을 하여 모든 과정을 이수하고 1913 3월에 졸업하였고 최성모는 목사로 안수를 받고 만주 봉천교회 목사 외몽고 선교사로 파송이 되었다. 이후 1917 황해도 해주 남본정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1919 3.1운동 당시 자원하여 민족대표로 가담을 하기도 하였으며 이때 그는 만세운동만이 민족이 있는 길이라 인식하고 전국적인 만세시위를 지휘하기도 하였다.

그는 3.1만세에 가담했다 하여 일경에 체포되어 2 동안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일제의 갖은 고문을 받기도 하였다. 형기를 마친 최성모는 출옥 즉시 다시 목회의 길을 택하여 나서기도 하였다. 서울 서강교회에서 목회할 수시로 일본 경찰관의 조사를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의 축복으로 알고 열심히 일제의 포악한 정치에 서슴없이 비판을 가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심한 감시로 목회하는데도 많은 어려움이 있었지만 일도 주님이 주신 축복으로 알고 모두 감수했다고 한다. 1922년부터 서울 상동교회에서 잠시 목회를 하였다가 만주지방 선교사로 파송을 받고 사역을 하였다. 귀국하여 충남 천안교회, 여기에 충남 예산교회에서 사역을 하다가 병고로 은퇴하고 잠시 요양원에서 요양생활을 하다가 1937 3월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별세를 하였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그의 사망을 안타깝게 여겼던 사람들이 모여서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962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을 받았으며, 그의 시신은 국립 동작동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치되었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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