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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622호]  2018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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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8.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배포했던 이만규 열사
[[제1570호]  2017년 11월  4일]

이만규(李萬珪, 1888-1978) 열사는 강원도 원성군 간현에서 출생하였으며, 1893년에서 1907년까지 고향의 사숙에서 한학을 공부하였다. 의사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1907 4 서울로 상경(上京)하여 경성관립대한의원부속의학교(京城官立大韓醫院/京醫專專門前身) 입학하여 1910 8 우등생으로 졸업하였다.

이만규는 조국이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는 것을 체험하면서 뜻한 바가 있어 같은 해인 1910 9월에 서울 상동교회의 부속기관인 서울 상동청년학원 교사로 부임하였다. 그는 조국의 미래를 짊어질 젊은 청년들을 교육하기 위해서 상경을 하였다.

한편 그는 연정학당과 봉명학교의 교사로 봉사를 하다가 서울 시내 인사동에 자리를 잡고 있는 승동교회( 서울 勝洞敎會) 부속 승동남여학교의 명예 교감 등을 겸임하면서 활동하였다. 1910 한일합방 이후 1911 5월에 의사개업 면허장(免許狀) 받고 1912 4 개성(開城)에서 고려병원(高麗病院) 개업하면서 이전에 맡았던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려병원을 폐업하고, 1913 윤치호의 권유로 개성 사립 한영서원 교사로 부임하였다. 일찍이 윤치호(尹致昊) 구국(救國) 꿈을 안고 설립한 기독교학교 한영서원은 후에 송도고등보통학교로 개편되었는데 이만규는 학교에서 생리(生理), 수학(數學) 과목을 담당하는 한편 학생들에게 은밀히 한글과 역사를 가르쳤다. 특히 1919 3.1운동 때는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여 배포를 하였으며, 4월에는 개성지역의 유력자와 독립운동을 계속 추진하려다가 발각되어 4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1926 3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사임한 이만규는 같은 4 1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로 부임하였으며, 종교교회에 출석을 하였다. 1938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옥고(獄苦) 치르기도 하였다. 또한 1942 조선어학회(朝鮮語學會) 사건으로 1년간 옥고를 겪었던 기간을 제외하고는 1946 배화여고를 떠날 때까지 민족주의(民族主義) 입장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가 가르쳤던 과목은  물리, 화학, 습자(習字)였으며, 그는 1936 5 10 근속기념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1933 조선어학회가 제정·공포한 <한글맞춤법 통일안> 초안작성위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6 조선어학회 표준말 사정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한편 그의 기독교 신앙은 확실했으며, 사회적으로 정향된 능동적이고 활발한 신앙 생활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1930 12 2 설립된 <기독교조선감리회=남북감리교 합동> 조직을 앞두고 감리회의 특선위원으로 선출되어 <역사적 선언과 예문분과>에서 웰치, 양주삼, 홍병선, 김종우 목사와 함께 활동을 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인 1945 9 18 9 배화여학교 교장으로 취임을 하였다. 무렵 혼란한 민족 상황에서 <중도좌파의 > 택하였으며, 특히 그는 건국동맹,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보건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사돈지간인 여운형과 함께 좌우익 세력을 망라한 통일전선의 방향에서 자주적인 민족통일국가의 형성을 위해 일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자신의 뜻을 같이하는 교사들을 채용하였다.

그러나 그를 중심으로 하는 배화는 당시 우익계의 교육인사들이 주도하던 미군정 문교부의 교육정책과 마찰을 빚을 수밖에 없었다. 1946 6 미군정 문교부가 서울국립종합대학 안을 발표하자 당시 좌익 정당의 교육학적 논리를 수용한 <조선교육자협회> 주도적으로 참여하던 그는 배화 교사들과 함께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결과적으로 신탁통지에 대한 좌우익의 대립이 심화하던 1946 중반 무렵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 속에 중도좌익으로서의 자리를 잃은 그는 배화를 떠나야 했다.

그는 교육 관련 활동을 펼치며 민족재건운동에 참여하였으며, 1947 자진 월북하여 상임위원을 거쳐 문교장관으로 취임하였다. 이후 1950 6.25전쟁이 일어나자 유엔군과 함께 서울에 입성을 하였다. 1950 7 그는 김창준, 박성채, 최문식, , 심명섭 등과 함께 <기독교민주동맹> 조직하고 인민군(人民軍) 환영대회(歡迎大會), 신도궐기대회(信徒蹶起大會) 개최하였다. 그리고 교역자(敎役者) 대상의 강연회, 국방헌금 모금 등의 활동을 하였다.

김수진 목사

<한국교회역사연구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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