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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건국대통령 이승만 장로 편 - “공산진영과 늘 맞서 싸워야 함을 역설한 이승만”
[[제1571호]  2017년 11월  11일]


독일에서는 히틀러의 범죄에 대해서 철저히 가르친다. 특히 핵심이 되는 것은 2차 대전의 발발이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으로 전쟁이 일어났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히틀러의 의도적인 공격 때문이 아니고 그 당시의 국제 정세때문에 어쩔 수 없이 전쟁이 일어났다거나, 한국의 너절한 수정주의자들처럼 크고 작은 갈등이 증폭되어서 전쟁으로 번졌다는 식의 주장을 하는 자들을 독일에서는 극우 세력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독일의 극우가 한국에 오면 자칭 진보가 된다. 소위 진보 세력이라는 정당의 대표를 지낸 이정희는 6.25에 대한 질문을 받고 남침인지 북침인지를 확실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서울대 법대에 여학생 수석으로 입학했고, 학력고사 전체 수석이라는, 확실치 않은 정보가 널리 알려지기도 했다.

이름 난 학교 나왔고 전국 일등이라는 소문까지 난 국회의원이 이 땅에서 일어나 500만 이상이 죽은 전쟁을 누가 일으켰는지도 모른다. 글자 그대로 배운 무식자이다.

194935일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남침을 허락해줄 것을 요청했다. 스탈린은 일단 거부했다. 그러면서도 대규모의 군사 지원을 제공했다. 1949년에는 한반도의 주변 정세에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미군이 철수했고 소련이 핵개발에 성공했다. 치열한 내전 끝에 광활한 중국 대륙을 공산당이 장악했다. 동북아시아의 정세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195017일 김일성은 또다시 스탈린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때 스탈린에게 보내는 메시지에서 김일성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훈련받았기 때문에 독단적인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며 스탈린 동무의 명령은 자신에게는 법”(Orders given by Stalin are law for him)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은 주체를 앞세운 김일성이 사실은 엄청난 사대주의자(事大主義者)임을 보여준다. 일국의 지도자가 다른 나라 지도자의 말을 법으로 받든다면, 결코 독립일 수도 주체일 수도 없다. 이승만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한낱 꼭두각시일 뿐이다.

김일성의 충성 서약을 그대로 전해 받은 스탈린은 130일에 전문을 보내어 남침을 허락했다. 19504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미국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를 대비해서 모택동에게 협조를 받으라고 권유했다. 그에 따라 김일성은 모택동을 만났다. 모택동은 1950513, 만약 미국이 개입하면 중국이 병력을 파병하여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영훈은 한국전쟁은 주도면밀하게 기획되고 추진된 국제전이었다고 말한다. 전쟁의 양상이 형언하기 힘들 정도로 참혹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의 첫 번째 조치는 미국의 참전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626일 새벽 3, 도쿄에 있는 맥아더에게 전화를 걸었다. 부관은 장군이 지금 취침 중이니, 나중에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이승만은 전화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한국에 있는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테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

놀란 부관이 당장 맥아더를 깨웠다. 이승만은 오랜 친구 맥아더에게 분노를 쏟아부었다.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더라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았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 맥아더는 한국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전쟁의 소식이 들렸을 때, 트루먼 대통령은 고향에서 주말을 보내고 있었다. 미주리 주 인디펜던스에 있던 그에게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화를 걸었다. 남침 소식을 듣자, 불과 10초 만에 트루먼은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개자식들을 저지해야만 해!”

다음날 트루먼은 백악관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워싱턴으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트루먼은 생각에 잠겼다. 그는 훗날 자신의 회고록에서 그날의 기억을 술회했다. “나는 과거 민주국가들이 이런 공격을 저지하지 않아 침략자들이 그런 짓을 계속하도록 방치했던 일들을 생각했다. 만약 공산주의자들이 자유세계로부터 아무런 저지를 받지 않고서 한국을 침략할 수 있도록 허용된다면, 강한 공산국가를 이웃으로 두고 있는 작은 나라들은 협박과 공세를 견디지 못할 것이다. 이번 공격을 방치한다면 제 3차 세계 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비슷한 사건들이 제 2차 세계 대전을 불렀듯이.”

그날의 신속한 결단이 우리를 살렸다. 훗날 트루먼이 대통령에서 물러날 때 그의 지지도는 역대 최저였다. 한국전쟁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역사는 자신의 편이라고 믿었다.

그의 확신처럼, 오늘날 트루먼은 자유 진영이 공산 진영을 물리치는 토대를 구축한 위대한 지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그 첫 단추가 한국에서 끼워졌다. 미국은 한국전쟁에 참여하여 공산주의에 맞서 싸울 것을 분명히 했다. 그것이 미국의 기본 정책이 되었다. 트루먼 노선에 따라 50여 년간 싸움을 지속한 결과, 마침내 공산권을 무너뜨리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한민국의 항전의지(抗戰意志)

전쟁 초기에 가장 중요했던 사건은 이승만과 트루먼이 즉각적으로 싸우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생각되지만, 결코 당연하지 않다.

경제 문화 기술 대국이었던 중국의 송나라는 싸우려는 의지가 없었기에 거란, 여진, 몽골에게 차례로 뜯어 먹히다가 비참하게 멸망했다. 서방 국가들이 계속해서 싸우기를 회피했기에 히틀러는 순식간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북한에서 조금만 위협을 가해도 일부 정치가들이 전쟁이냐, 평화냐라며 북한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날 것처럼 국민들에게 겁을 주었기에, 조그마한 북한이 거대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었다. 올리버가 이 점을 적절하게 지적했다.

“1950625일의 그 외로운 일요일 아침, 공산 침략에 맞서 싸우기로 한 이승만의 결정은 자유세계가 궐기해 소련 제국주의 침략의 물결을 저지하도록 경각심을 불어넣는 계기를 만들었다. 희생은 한국이 치를 수밖에 없었지만 자유세계는 공산주의에 대항할 필요성을 깨닫고 준비에 필요한 시간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올리버의 지적은 정확하다. 이승만이 앞장서서 싸웠고, 자유세계는 그를 지켜보면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싸움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이승만은 세계적인 선구자였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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