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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 교회 성장과 기독교인 증가에 영향을 끼친 韓美同盟
[[제1589호]  2018년 4월  7일]

한미 동맹으로 대한민국이 받은 혜택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몇 가지로 정리해 본다.

첫째로 한반도 및 그 주변 지역에 장기적인 평화가 유지되었다. 70년도 안 되는 기간 동안 대규모의 전쟁만 6번 일어났던 한반도에는 1953년 이후로 단 한 번의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다. 한반도는 세계의 화약고였다. 그런데 한미 동맹이 화약에서 뇌관을 제거해 버렸다.

둘째로 미국의 확고한 방위 보장에 힘입어 한국의 비약적인 경제 성장이 가능해졌다. 미군의 주둔과 지원은 국방비 절감 효과로 이어졌다. 한국은 1970년대 전반기까지 평균 GNP4%라는 비교적 적은 국방비만을 써 가면서 경제 개발 우선 정책을 추진할 수 있었다. 그것이 한강의 기적으로 이어졌다.

셋째로 한미 동맹으로 한국은 군사 강국이 될 수 있었다. 1907년에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에 의해서 강제로 해산될 당시, 군인 숫자는 중앙군 4215, 지방군 4305, 헌병대 205, 도합 8785명이었다. 1만 명도 안 되는 미약한 군사력이었다. 그런데 한미 동맹으로 한국군 20개 사단이 현대화되었고, 대한민국은 총 병력 70만의 대군을 거느리게 되었다.

넷째로 한미 동맹은 한국의 민주화에 기여했다. 미국은 동북아권의 안정에 도움이 되는 민주화를 후원했다.

다섯째로 미국이 지원을 받아 한국은 외교망을 확대했다. 미국은 한국이 민주주의의 전시장이 될 수 있도록 외교 부분에서도 지원했다. 미국의 동맹국이라는 점이 한국 외교에 기여한 바는 적지 않았다.

여섯째로 한미 동맹은 한국에 문명사적 전환을 초래했다. 한국은 오천년 동안 대륙 문화권에 속해 있었다. 중국을 중심으로 한 유교 문화권에 위치했고 역시 중국을 대국으로 섬기는 사대주의 외교를 추진했다. 하지만 한미 동맹으로 한국은 해양 문명권으로 진출하게 되었다. 중국과 소련 등 대륙 문명권이 모두 공산화된 상황에서, 반도에 위치해 있지만 휴전선에 가로막혀 사실상 섬이 된 한국은 바다로 뻗어나갔다.

일찍이 이승만은 태평양이 우리 민족의 활동 무대가 되기를 꿈꾸었다. 고단하고 힘겨웠던 망명 시절에, 고달픈 하와이 이민자들을 대상으로 만든 잡지에 태평양 주보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그런 염원에서였다. 한미 동맹은 이승만의 꿈에 날개를 달아 주었다. 오늘날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글로벌 코리아는 이승만의 꿈의 실현이다.

일곱째로 한미 동맹은 한국의 개방을 촉진했다. 한국은 오랫동안 폐쇄적인 국가였다. 같은 동양권에 속한 중국이나 일본과의 교류도 활발하지 않았다. 그런데 한미 동맹을 통해서 한국과 밀접해진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개방적인 나라였다. 미국과의 우호적인 교류는 한국의 모든 분야에서 개방을 촉진시켰다. 과거 은둔자의 나라였던 한국은 점차 5대양 6대주를 누비는 개방 국가로 성장했다.

여덟째로 한미 동맹은 한국의 기독교화에 영향을 미쳤다. 한국과 미국의 관계에는 적지 않은 진통과 굴절이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미국은 일본을 물리침으로써 한국을 해방시켰고 건국을 지원했으며 공산 세력의 침략에서 한국을 보호해 주었다. 폐허가 된 한국에서 수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보낸 구호물자로 살아갔다. 미국의 지원은 주로 기독교계를 통해서 이루어졌다. 한국인들에게 미국은 은인의 나라, 구원자의 나라가 되었고 이는 교회의 성장과 기독교인의 증가에 영향을 끼쳤다.

한미 동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동맹으로 평가받는다. 이는 건국과 마찬가지 우리 역사 최고의 천재인 이승만의 필사적인 노력이 만들어 낸 결과이다. 필자는 이승만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왔다.

인류 역사 7천년을 연구해 보라. 동서고금의 역사책을 뒤적여봐라. 약소국의 지도자 가운데 이승만 만큼 강대국에게 당당하고 할 말 다했던 인물이 있었는가? 이승만이 만들어 낸 한미 동맹만큼 약소국에게 유리하고 이익이 된 외교 사례가 있는가? 강대국이 자발적으로 약소국의 안전을 위해서 인질이 되어준 사례가 주한 미군 이외에 또 있었는가

지금까지 필자에게 대답을 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9

- 4.19혁명과 영웅의 퇴장

 

비극의 시작, 1954

시간은 폭군이다. 시간이 휩쓸고 지나가면, 모든 것이 형체를 잃어버린다. 한미 동맹은 이승만의 황혼이었다. 스러지는 햇살이 힘을 다해서 세상을 노을빛으로 물들이듯, 그의 천재성과 탁월성이 빛을 발한 찬란한 광채였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황혼은 스러지고 노을은 사라져 남은 것은 어둠이었다. 생각해 보면 꽤 늦게 찾아온 황혼이었다. 당시 한국인들의 평균 연령은 사십 세 안팎, 누군가 환갑을 넘기면 마을에서 잔치를 벌이던 시절이었다. 동맹을 맺어낸 1954, 이승만은 우리 나이로 여든이었다. 천재이고 아무리 탁월하다고 해도 가는 세월을 붙잡을 수는 없었다.

노년의 이승만은 실책을 연발한다. 세상을 살피던 그의 눈은 흐려졌다. 발걸음도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아무래도 나이를 속일 수는 없었다. 이승만의 주변 인물들은 1954~1955년을 고비로 이 박사의 총명함이 현저히 둔화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증언한다. 실제로 이 시기 이후, 이승만은 외교와 정치면에서 뚜렷한 성과를 보이지 못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에 빛을 가져왔던 그였지만, 마지막 시간들은 오히려 이 나라에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승만이 노년을 불행하게 마무리한 일등 공신은 자유당(自由黨)이었다. 이승만 정권 내내 국회는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비판자였다. 이대통령은 국회 내의 기존 정당들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기에 1952년에 자신이 주도하는 정당을 창건하기로 결심했다.

이승만 정당의 이름은 본래 노농당(勞農黨)’으로 계획되었다가 자유당으로 바뀌었다. 최초에 제안된 이름이 말해주듯이, 이승만은 노동자와 농민 대중을 대변하려는 정당을 세우고자 했다. 이 대통령은 가장 유력한 정당인 한국민주당(韓民黨)모든 세력자와 부호한 사람들의 의도를 받아가지고 대다수 민중의 회복을 돌아보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실제로 한민당의 주축은 지주, 양반 출신이었다. 따라서 그가 세우려는 정당에는 노동자와 농민을 많이 넣으라고 여러 차례 지시했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거룩한 대한민국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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