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장로신문
뉴스오피니언교양피플미션말씀특별기고 | 지난연재물
[제1602호]  2018년 7월  14일
기사검색
전장연 총회 교단 교계 동정 연합기관행사일정 특별기획 포토에세이
클로즈업
예수의향기(와이드,믿음의기업)
금주의 초대석
우리교회 이사람
건강관리기법
추억의사진
대인물열전
Home > 피플> 대인물열전
79. “팔방바람에 지치고 눈과 귀가 막힌, 완고한 노인이 되어가다”
[[제1590호]  2018년 4월  14일]

자유당은 8년간 집권 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노동자와 농민 등의 대중을 위한다는 창당 취지는 어느새 흐릿해졌다. 자유당은 대통령을 내세워서 잇속을 챙기며 기득권을 지키려는 부패 정당으로 변질되어 갔다. 하지만 노년의 이승만은 자유당을 제대로 단속하지 못했다.

그것은 1954년부터 뚜렷이 나타났다. 그해 5월 제3대 민의원 선거가 진행되었다. 선거는 난장판이었다. 경찰이나 폭력단에 의한 방해, 간섭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던 부정 선거였다. 그런데도 이 대통령은 오히려 경찰의 간섭에 항의하는 사람을 소송에 실패한 자가 원통하다고 불평하는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였다. 선거가 끝난 다음에는 대체로 순조롭게 치러진 것이라고 치하했다.

이 장면은 이승만이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이유는 ()의 장막이었다. 고령(高齡)의 대통령을 옹위하는 세력들이, 대통령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혹은 연세 드신 국부(國父)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다는 구실로 대통령과 세상을 격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측근들이 둘러친 장막이나 대중과 격리가 정치 지도자를 몰락시킨다는 것은 동서고금의 진리이다. 이승만 역시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949년에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대통령의 지위나 영광을 중히 여기는 것이 아니요, 우리 민국과 우리 민족을 보호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민주주의의 보루가 되게 하자는 것만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니, 대통령의 자리에 앉음으로 인해서 말과 행동을 자유로 못하고 민중과 나 사이에 의사소통이 충분히 되지 못한다면 심히 유감으로 여길 것입니다.”

그때만 해도 소통이 안 되는 것을 염려했고 실제로 소통이 잘 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이 80을 넘기면서 소통은 불통으로 변질되었다.

자유당은 1954년의 선거에서 불법을 저지른 끝에 원내 절대 다수당을 차지했다. 이승만은 부정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는 불법에 면죄부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오히려 자신감을 얻은 자유당은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는다. 그것이 3선 개헌이다.

19541117, 개헌안을 둘러싼 민의원 표결이 진행되었다. 재적 203명 중에 찬성이 135표였다. 헌법을 개정하려면 재적 인원의 3분의 2가 동의해야 하는데 135표는 한 표 부족한 수치였다. 따라서 국회는 개헌안의 부결을 선포했다. 하지만 국회의 선포는 부결에서 가결로 번복되었다. 이때 동원된 것이 사사오입(四捨五入), 우리 국회를 촌극으로 만든 논리였다.

이재학 자유당 원내총무는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현 재적 의원 203명 중 3분의 2에 해당하는 정확한 수치는 135.333...인데 자연인을 정수가 아닌 소수점 이하로 나눌 수 없으므로 사사오입의 수학적 원리에 의하여 가장 근사치인 135명이 의심할 바 없다. 개헌에 필요한 3분의 2 이상이라는 것은 3분의 2 초과라 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의 법률적 용어로서 3분의 2를 포함해서 3분의 2와 그보다 많은 수를 지칭하는 것이며 이것을 전술한 수학 방법에 의하면 135명의 찬성으로서 개헌안은 가결되는 것이다.”

결국 개헌안은 통과되었고 이승만은 계속해서 대통령에 출마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무리한 개헌의 후유증은 컸다. 독립 운동가로, 건국의 아버지로 대다수 국민에게 존경받던 이승만은 권력에 눈 먼 독재자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국민의 거부감은 가속화되었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발은 집권 자유당 내에서도 일어났다. 14명의 소장파 의원들이 3선 개헌에 반대하고 탈당했다. 그중에 훗날 대통령이 되는 김영삼도 있었다. 사사오입이라는 기상천외한 논리를 동원한 자유당에 맞서서 야당은 연합을 이루었다. 14명의 자유당 탈당파와 장면(張勉)이 이끄는 흥사단 세력, 민국당 후속 인물들이 1956919일 민주당을 창당했다. 이에 따라 자유당과 민주당의 양당 구도가 정립되었다.

1954년은 몰락이 시작된 해였다. 이승만은 팔방의 바람에 지치고 눈과 귀가 막혀진, 완고한 노인이 되어갔다.

 

무르익어 가는 혁명의 기운

3선 개헌을 전후해서 이승만에게 도전할 정치 세력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국회에서는 자유당이 다수를 차지했다. 전쟁을 치르면서 군과 경찰, 관료 조직은 이승만에게 장악된 상태였다. 토지 개혁으로 농민들을 해방시키고 공산화를 막고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까지 받아낸 이승만은 글자 그대로 국부(國父)였다. 하지만 권력은 부패하고 절대 권력은 절대로 부패한다. 동서고금의 역사에서 자명한 진리를 이승만이라고 피해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권력이 집중된 시기에, 그는 노화되었고 자유당은 경직화되었다. 계속해서 문제는 곪아가고 있었다. 정권의 경직화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분야는 언론이다. 이승만 정권 치하에서 언론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문맹률이 퇴치되면서 구독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다. 1954년 당시 56종의 일간지, 177종의 월간지를 포함한 411종의 언론기관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언론 정책은 대단히 관대했다. 정부에 대한 비판 논조가 강했던 언론으로는 구한민당 계열의 동아일보, 가톨릭계의 경향신문, 흥사단 계열의 사상계를 들 수 있다. 그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정권을 비판하는 자유를 누렸다. AP통신이 한국의 언론 자유를 세계 4위나 5위 수준으로 평가했던 것이 그 점을 증명한다. 그 시절에 세계와 겨룬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등수는 1백위권 밖이었다. 경제력이나 평균 수명이나 인간 개발 지수에서 한국은 꼴찌 수준이었다.

그런데 언론에 있어서는 세계5위권이었으니, 얼마나 앞서나갔는지를 입증한다. 이처럼 5천년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 자유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보장한 위대한 민주주의자가 이승만이었다.

그러나 정권이 말기로 치달으면서, 언론 자유를 허용한 업적도 빛을 잃어갔다. 노령의 이승만은 자신에 대한 비판을 더 이상 인내하지 못했고, 자유당 정권은 매사를 힘으로 누르려고 했다.

언론 자유에 대한 제압, 더 나아가 탄압이 심해졌다. 1959년 마침내 경향신문이 폐간되었다. 국회에서도 권위주의적 경직화의 현상은 뚜렷이 나타났다. 이승만 집권 초기의 제헌 국회(1948~1950)의 말기의 4대 국회(1958~1960)를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확연하다.

 

[ 저작권자 ⓒ 장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저작권문의
이번호 많이 본기사
타락한 천사, 사탄, 루..
기드온의 ‘금 에봇’
147. 철종의 가계도 ..
59. 초락도 금식 기도..
<94-총회총대5>
332. ‘기도합니다’와..
“사나 죽으나, 선하게 ..
<94-총회총대4>
331. ‘고범죄’에 ..
박래창 장로(전국장로회..
만평,만화
햇볕보다 더 뜨거운 하나님 사랑.....
하나님의 동역자 된 장로들, 빛.....
44회 전국장로수련회 - 영적 충.....
공지사항
[정기휴간]5월 10일자
[9월 28일자] 추석연휴 휴간..
회사소개구독신청 지사 Contact Us Site Map

한국장로신문의 모든 콘텐츠(기사) 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ㆍ복사ㆍ배포 등을 금합니다.
청소년보호책임자: 이승담 | Copyright (c) JANGRO.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