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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3. “건국대통령, 말년의 과오로 덮기에는 너무나 컸던 족적”
[[제1594호]  2018년 5월  12일]


이승만 집권 이전에는 언론 산업 자체가 활성화되기 어려웠다. 일단 글을 읽을 줄 아는 국민이 20% 미만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글자도 못 읽는 사람들이 신문을 사서 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승만 집권기에 문자 해독률은 80% 이상으로 치솟았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언론은 활성화될 수 있었다.

정권 말기에는 경향신문 폐간과 같은 조치를 취하기도 했지만, 이승만은 대체로 언론의 자유를 존중해주었다. 따라서 언론은 자유롭게 정부를 비판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구독률이 높았던 언론들 가운데는 동아일보, 경향신문, 사상계 등이 있었다. 세 언론이 모두 이승만과 대립 구도를 형성했던 반대 세력들의 입장을 대표하고 있었다. 이처럼 언론의 성장과 자유로운 비판활동이라는 이승만의 업적이 있었기에, 시민들의 민주 의식도 향상되고 저항 의식도 자라날 수 있었다.

셋째로 이승만의 하야 결단은 그의 실책에도 불구하고 높이 평가할 대목이다. 일전의 중동 민주화 사태를 보면 이 점은 분명해진다. 수천 명, 수만 명이 죽고 다치는 상황에서도 학살을 저지르고 군대를 동원해가며 끈질기게 버틴 독재자들이 허다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잘못을 깨달았을 때, 국민이 원한다면 물러난다고 했던 이승만의 결단은 희생을 최소화했고 나라를 보존했다. 이 점은 4.19의 전개 상황을 날짜별로 살펴보아도 분명해진다.

412일 김주열의 시신이 떠오른 직후에 이승만은 잘못이 있다면 물러나야 한다고 스스로 말했다. 421일 국무위원 사퇴를 계기로 상황을 파악하자, 즉각 이기붕의 사퇴를 요구하고 시위로 부상당한 학생들을 찾아가서 눈물을 흘렸다.

425일에 교수단 시위에서 하야(下野)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들렸고, 다음날 시민 대표와의 면담에서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물러나야 한다는 말을 이승만이 처음으로 했고, 조윤제가 요구한 다음날 곧바로 사퇴한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말년의 과오가 평생을 쌓아올린 인격을 허물어뜨리지는 못했다.

넷째로 김인서는 성경의 레위기 16장을 인용하여 이승만을 아사셀이라고 표현했다. 아사셀은 민족의 죄를 대신 짊어진 속죄양을 가리킨다. 과연 이승만은 아사셀이었을까. 그저 본인의 죄로 본인이 받아야 할 벌을 받은 것 아닐까. 필자는 아사셀로 볼 수 있는 측면이 분명히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이는 몇 가지 사실로 확인된다.

이승만이 아사셀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려면, 이승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그 자리에 있었으면 비슷한 행동을 했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되어야 한다. 우리 민족의 지도자들 가운데 누구라도 그 상황에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것은 이승만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문제가 된다.

따라서 민족의 죄를 짊어진 아사셀이라는 주장은 타당성이 입증된다.

이승만은 민주주의 파괴자라고 비난받는다. 이 경우를 검토해본다. 19194월 필라델피아 한인 대표자 회의가 열렸다. 독립투사들과 유학생 100여 명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인의 목표와 열망이라는 5가지 결의문이 채택되었다. 그 가운데 정부 수립 후 10년간 중앙 집권식 통치를 할 것이라는 대목이 있다.

미국식 민주주의를 추구하되, 당장은 어렵기 때문에 10년 정도는 중앙 집권식 통치, 다시 말해서 강제성을 띤 권위주의적 통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1920년 서재필 박사가 상해 임시 정부에 보낸 정책 제안서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있다.

이것은 독립 운동가들 사이에서 일종의 합의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민주주의 전통이 약한 우리나라가 독립한 뒤에 곧바로 미국식 정치를 하기 어려웠다. 10년 정도는 강력한 중앙 집권 정치로 민주국가적 기틀을 준비한 뒤에 민주주의로 이행해야 한다는 것이 독립지사들의 시각이었다.

이는 중국 혁명의 아버지 손문(孫文)에게서도 발견되는 견해이다. 손문 역시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10년 정도의 중간 단계를 계획했다. 따라서 이승만이 아니라 누가 대통령이 되었어도 당장 민주주의를 실시하는 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승만이 헌법을 두 차례 개정했던 사실 역시 비난의 대상이 된다. 이승만의 헌법 개정은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 또 있다. 상해 임시정부의 헌법 개정이다. 임시정부는 5차례에 걸쳐서 개헌을 단행했다. 그중에 1차 개헌은 이승만을 위한 것이었고 4차 개헌은 김구를 위한 것이었다.

권영설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4차 개헌은 실질적으로 김구 주도력을 제도적으로 보장한 개헌이었다. 당시 김구는 장제스 정부의 지원을 받고 있어서 임시정부의 재정난을 타개해 나갈 수 있었고 과격한 민족주의자라고서 항일전을 능동적으로 지도할 인물로서 부각되었다.”

나라의 근본이 되는 헌법을 정치인 개인을 위해서 뜯어고친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 그렇게 문제가 있는 행동은 임시정부에서부터 계속되고 있었다.

6.25 사변의 와중에 전시작전권을 미국에게 넘긴 것도 비난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1941109일 중국과 우리 임시정부는 9개항의 행동 준승(準繩-법식,법도)’에 합의했다. 19405월 당시 임시정부는 중국 정부 장제스 주석에게 한국 광복군의 활동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했고, 중국 정부는 중국 국민당군(黨軍)의 지휘하에 둔다는 조건으로 광복군 창립을 허락받았다.

그것은 우리의 광복군을 중국군 총참모장 휘하에 두고 그 명령과 통제를 받아야 한다는 약속이었다. 우리의 전시 작전권을 중국에게 양도한 것이다. 대개 임시정부의 광복군이라고만 알고 있지만, 사실은 중국군 산하에 소속되어 있었다. 이 준승은 한국 광복군이 명실상부한 한국의 독립군이 아니라 중국의 보조, 즉 고용군이 된다는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필자의 소견으로 이승만의 과오는 대체 가능이었다. 그가 아닌 다른 누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저지를 가능성이 높았다. 그보다 더한 과오, 예를 들어 한반도의 공산화같은 엄청난 비극 역시 이승만이 아닌 누군가에 의해서 일어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이승만의 업적은 대체 불가능이었다. 그만큼 미국을 알고 공산주의를 알고 백성을 국민으로 전환시키는 작업을 지휘할 인물은 없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건국 대통령은 말년의 과오로 덮기에는 너무나 큰 족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이호 목사 <신안산대 겸임교수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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