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돌아 본 삶의 현장] 만나와 메추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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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과거를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또 미래도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걱정한다고 뭐가 달라질 것도 없었다. 내가 해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께서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기로 한 이상 맡겨진 일에 충성할 따름이었다. 

김 박사 집에서 6개월을 지낸 뒤 나는 대학가로 집을 얻어 옮겼다. 1979년 6월의 일이었다. 6월 4일부터 7월 6일까지가 여름학기였다. 나는 3월부터 정식 조교가 되었는데 학과장은 내가 딸까지 데려와 있는 것을 알고 여름학기에도 학생을 가르치도록 한 반을 맡겨 주었다. 그때 내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7시 기상, 7:40 집 출발 아내를 8시까지 직장으로 데려다주고 8:20 학교 조교실에 출근, 9:10~10:40 학생들 수업, 10:50~12:20 Office Hour(학생들의 상담시간), 12:30~14:00 내 강의 수강, 14:00~16:10 강의 준비 및 내 공부, 16:10~16:30 아내 픽업, 가끔 시장에 들러 귀가, 23:00~24:00 취침.

고단했지만 이제는 나를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남들처럼 되려고 노력하지도 않고, 주어진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만들어주신 ‘나’를 찾아 평안하게 살고 있었다. 고국에는 첫째 아들이 고3, 둘째가 고2로 대학 입학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고, 첫째 딸, 지희는 여기서 대학 입시를 위해 TOEFL 준비를 하고 있었다. 

숭전대학에서 받는 내 반 봉급은 8월 말을 마지막으로 끊어질 상황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이전 같으면 내게는 닥치는 미래의 걱정 때문에 괴로워 하루도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나 나나 이제는 우리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도 없는 일이었기 때문에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시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매일 충성스럽게 사는 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행히 큰딸은 자기가 받은 TOEFL 성적으로 내 대학 수학과에 입학 허가가 났다. 그녀는 내 딸이어서 등록금이 면제되었으며 9월부터 미국의 대학생이 된 것이다. 여기 큰아들 철에게 보낸 아내의 편지를 발췌해 적는다.

철에게: 

철아, 너희 예비고사 날에는 멀리서 온 식구가 모여 앉아 위하여 기도드렸다. 전화했더니 할머니께서 시험도 잘 보았고 건강하여 잠도 잘 잔다고 해서 퍽 기뻤다. 너는 갓난애 때부터 잘 자고, 잘 먹고, 잘 놀고 하더니 커서 공부까지 잘하니 하나님 축복인 줄 알고 감사할 뿐이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온 정성을 너희 형제들에게 기울이고 계시니 그 은혜에도 감사해야 하겠다… (1979년 11월 6일)

 …아빠는 네가 예시를 잘 봐서 전국 1위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기대가 크시다. 아무튼, 장하고 감사하다. 너는 이렇게 좋은 결과로 우리 가족과 선생님들 모두에게 보답한 셈인데 엄마, 아빠는 뭣으로 보답을 할까? 우선 $1,000을 송금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다. 할머니 겨울 오버 $100, 1, 2, 3학년 담임 선생 선물 $120, 대학생이 된 네 양복 기타 $200, 동생 옷 $80, 계 $500. 그리고 나머지는 생활비로 비축해라. 다음부터는 아버지 봉급이 안 나오기 때문에 3개월에 한 번씩 이렇게 보내겠다…(1979년 11월 20일)

철이는 서울대학교의 본고사에 합격했고 대전고등학교 재학 중 동문회에서 준 장학금은 고등학교 3년의 장학금일 뿐 아니라 서울대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는 일정 성적을 유지하는 동안 계속 주어지는 장학금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먹여 주셨다.

오승재 장로 

•소설가

•한남대학교 명예교수

•오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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