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저일 생각하니] 나와 아내의 낙원 우리집 마련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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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5년 6월 24일 12시 마포 행화정교회 고 박창균 목사님 주례로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소강당에서 안송희 아씨와 결혼식을 올렸다. 박창균 목사님은 그때 내가 출석하던 마포 아현동 산칠교회 고 최명환 목사님과 한국신학대학 동문이셨다. 대학생들의 한일비준반대 시위가 광화문 거리에 심하던 때였다. 아내의 뜻에 따라 속리산 쪽으로 신혼여행을 가다가 통일호열차 안에서 나의 양복저고리 주머니를 보니 신혼여행비 4천200원이 소매치기당하고 없었다. 황당했다. 

아내와 새 가정을 이뤄야할 남편이 무일푼 남편이 된 것이다. 결혼 첫날 몹시 기분 나빴으나 아내가 장인 어른이 주신 비상금 2천 원이 있다해 마음을 정돈하고 우리 신혼부부는 대전역에 내려 방향을 유성온천으로 바꿨다. 버스에 시달려 간 유성온천 군인호텔을 찾아갔다. 

민간인에게도 사용이 허락된 논 가운데 서 있는 2층 호텔이었다. 텅빈 호텔 2층 한방에서 첫날밤을 보낼 때 소매치기 당한 새 신랑 나의 기분은 마냥 불쾌했으나 그날밤 유성 밤하늘 은하수 물결의 별들이 우리 신혼부부 첫날밤을 밝고 행복한 별빛으로 쏟아주고 호텔주변 벼포기가 심겨진 무논에서는 개구리합창단이 밤새도록 우리 신혼부부 첫날밤을 축하해 주었다.

신혼 첫날밤을 우리 부부는 주님께 감사기도로 보내고 다음날 서울로 귀가했다. 예상 밖으로 빨리 귀가한 우리 부부를 보신 장인 어른은 전보를 치면 신혼여행비를 보내줄 텐데 그리 빨리 귀가했느냐고 안타까워 하셨다. 

그때 우리 신혼부부가 살 전셋집으로 이대입구 염리동에 장인의 친구인 서울여고 서무부장의 새로 지은 집 2만 원짜리 조그만 방 하나가 우리 신혼부부 낙원이었다. 

근처 동성고교 서무부장 집과 염산교회 최탄희 장로댁으로 옮겨 사는 동안 나는 3남매를 두게 되었다. 직장도 성만여자상업전수학교(현 신경여상), 영등포공고 중앙여고로 옮겨 근무하게 되었다. 부산에 살던 여동생 셋을 내가 중․고교에 교육시킨다고 우리집에 함께 사느라 단칸방에 함께 살다가 고 최탄희 장로댁에서는 방 두 개에 50만 원 전세로 살고 있었다. 최탄희 장로님 소천으로 나는 이사를 가야했다. 

그때 장남 10세, 딸 9세, 막내아들 5세로 3남매를 둔 우리 부부는 애가 많다는 이유로 전세방을 얻을 수 없었다. 우리 부부는 50만 원 전세금을 기준으로 서울 변두리에 내집 마련을 해 보자고 했다. 그 무렵 나는 대신고교에 근무 중이라 수업이 빈 시간에 은평구 기자촌, 영등포구(현 강서구) 화곡동 일대를 헤매다녔다. 수업에 쫓겨 아내에게 복덕방에 알아보고 오라하며 나는 수업하러 독립문 근처 대신고교로 돌아왔다. 

그날 귀가해 만난 아내는 화곡동에 알맞은 작은집이 하나 있다 했다. 50만 원 전세금을 기본으로 해 화곡본동 61-114(현 까치산로 10길 37-10) 주소의 집 대지 33평, 건평 18평 200만 원에 가까운 집을 사는데 성공했다. 은행빚도 있긴 하나 내집 마련은 하늘을 날아갈 듯 기뻤다. 

1973년 3월에 이사해 남매는 화곡초등학교에 전학시켰다. 그리고 학교 앞 화성교회 주일학교에 다니게 했다. 나와 아내는 아현동 산칠판자집교회를 2년 더 출석하고 평북 의주 출신 장경재(1918-2001) 목사님이 개척하신 화성교회로 교회를 옮겼다. 내외가 고등부 교사로 봉사하기 시작했다. 우리집도 1990년도 내가 세브란스병원 환자로 입원 중에 집을 지하 포함 3층으로 다시 지어 현재 55평집 주인이 되어 주님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 

아우 오동해 집사를 비롯 세 여동생도 전도해 모두 신앙생활 잘하고 있다. 장남도 부산에서 목사 시무, 딸도 화성시에서 이주민 선교 부부 선교사로, 막내 아들도 교회집사로 모두 주님 안에 복되게 살아가고 있다. 팔지 않고 50년 넘게 사는 우리집, 아내와 나의 낙원으로 주님께 감사하며 살아가고 있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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