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3월 10일은 도산 안창호(1878-1938) 선생 88주년 추도일이다. 흥사단 단우들이 도산공원 산소에 가서 참배했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하고 16세에 신학문을 배우러 상경해 구세학당(일명 언더우드 학당 경신고교 전신)에 입학 후 3년 만에 수료하고 강서 고향에 초등점진학교를 세워 한국 남녀공학 시초를 이뤘다. 25세 되던 해 약혼녀 이혜련과 결혼하고 교육학 전공차 도미했다. 그러나 무지한 교포지도에 헌신하다가 을사늑약 정미칠조약 등으로 나라의 위기를 느껴 도미 5년 만에 1907년 2월 22일 제물포항으로 귀국했다. 애국비밀단체 신민회를 조직하며 선천예배당에 갔을 때 부르는 찬미가 소릴 듣고 영감을 얻어 평양에 올라갔다. 이틀 금식기도하고 사철 배경의 애국가를 지었다. 영국 민요곡에 얹어 부른 이 애국가가 선천예배당과 선천일대 애창곡이 되었다. 도산은 애국가 가사에 시조 두 수에 나오는 순국애국사상을 넣어 작사했다. 2절에 사육신 성삼문(1418-1456) 충의가의 순국사상을 담았다.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 하니/봉래산 제일봉에 낙락장송 되었다가/백설이 만건곤할제 독야청청 하리라” 이 시조의 독야청청 충의정신은 애국가 2절의 가사 “남산위의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구절에 깊이 스며있다. 성삼문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응부 유성원, 사육신 여섯 신하가 단종복위 혁명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세조의 악독한 고문을 받았다. 세조가 벌건 불젓가락으로 담금질을 해도 상감마마 소리 한 번 없는 성삼문을 보고 처형하기 아까워 잠깐 옥에 가두고 내시를 시켜 회유해 보았다. 그 대답이 봉래산(금강산) 제일봉 낙락장송 소나무가 되어 백설(세조세력)이 천지에 기승을 부려도 매죽헌 성삼문은 상왕 단종께 신의 지켜 충성하겠다는 오직 순국충성의 결심만을 보여주었다. 세조가 성삼문 보는 앞에 아들 5형제를 다 죽여도 성삼문의 독야청청 순국사상은 변함이 없었다. 세조는 “내 앞에서는 역신이로되 훗날 충신 소릴 듣겠도다” 내시 앞에서 세조도 내심은 성삼문의 독야청청 정신의 그 미래를 예측해 말했다. 영조때 세조 예측대로 성삼문은 명예회복이 되어 이조판서로 추증되었다. 사육신이 다 명예회복이 되고 벼슬이 추증되었다. 이 만고충신 성삼문 순국애국정신을 도산은 애국가 2절에 담아 작사했다.
포은 정몽주(1337-1392)는 여말 삼은(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야은 길재)의 하나로 고려를 지키다 개성 선죽교에서 순국했다. 정몽주는 이방원(조선조 3대 태종)의 하여가 시조에 단심가 시조로 화답했다. 포은은 고려사랑 순국정신을 단심가에 담아 읊었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줄이 있으랴”로 기우는 고려를 지키겠다는 순국각오를 잘 표현했다.
시조창작의 반복법 점층법의 수사기교를 보이며 이성계 이방원 일파의 고려 멸망세력에 홀로 충의의 일편단심을 보인 것이다. 단심가 시조의 순국사상은 애국가 3절에 잘 표현되어 있다. “밝은 달은 우리 가슴 일편단심일세” 이 노래 가사는 단심가의 시조 종장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와 나라 겨레사랑의 순국사상과 일맥 상통하고 있다. 60 한평생 독립운동하며 일제의 감옥에 두 번이나 옥고를 치룬 도산 안창호는 1907년 3월 주권혁명가로 애국가를 작사했다. 1절에 하나님 기독사상(하느님으로 일반화함), 2절에 독야청청 충의 순국정신, 3절에 일편단심의 충의 순국정신, 4절에 소나무 청청기상, 밝은 달의 일편단심 마음으로 작사했다. 동해, 백두산, 가을하늘, 봉래산, 밝은 달 같은 자연사랑도 애국가에 잘 담겨있다. 성삼문 정몽주 시조 두 수의 순국애국정신 깃든 우리 애국가를 깊이 시랑하고 국민은 4절까지 뜻 깊게 잘 불러야 하겠다. 나라는 속히 애국가 작사자는 도산 안창호로 공인해 주길 바란다.
오동춘 장로
<화성교회 원로, 문학박사, 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