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의 길]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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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이어 이삭은 가나안에 정착하려 애를 쓰는데, 토박이들의 텃세가 참 모질다. 돌짝 밭 일구며 백 배를 얻었더니 나가란다. 

내 땅 한 평 없이 떠도는 인생이니, 어쩌랴. 참 서럽다. 형 놀부의 나가라는 한 마디에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어 저녁노을 바라보며 흘리던 흥부의 눈물과 무엇이 다를까. 하여, ‘이삭이 기가 막혀’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거기가 끝이 아니다. 아버지가 팠던 우물을 파서 어떻게든 먹고 살아보려 했더니, 또 쫓겨나고 거듭 쫓겨나고 결국 밀리고 밀려 골짜기 신세가 된다. 

그런데 이삭 이 양반, 참 대단하다. 한 번도 불평이 없다. 가라면 가고 머물 곳 찾으면 멈춘다. 그런 과정에 그의 이름처럼 씨익, 웃음 한 번 던지고는 끝이다. 비결이 뭘까. ‘다시’라는 단어가 존재한다는 사실과, 이 단어의 사용처와 때를 알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 아버지 아브라함 때에 팠던 우물들을 다시 팠으니”(창 26:18). 쫓겨날 때마다 꺼내 드는 카드 한 장, ‘다시’. 그런 의미에서 이보다 거룩한 단어가 또 있을까.

시인 도종환은 ‘다시 떠나는 날’이라는 시에서 ‘깊은 물 만나도 두려워하지 않는 물고기처럼 / 험한 기슭에 꽃 피우길 무서워하지 않는 꽃처럼 / 길 떠나면 산맥 앞에서도 날갯짓 멈추지 않는 새들처럼’ 다시 떠나보라 제안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에는 두 가지 불문율이 있었다. 거룩한 백성이니 망하지 않는다는 것과 성전은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두 가지가 동시에 무참하게 되었다. 바벨론에 의해 나라는 망하고 성전도 불타 없어지고 말았으니,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망연자실, 할 말이 없다. 그런 이들을 앞에 두고 예레미야가 눈물로 호소하노니, “여호와여 우리를 주께로 돌이키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께로 돌아가겠사오니 우리의 날들을 다시 새롭게 하사 옛적 같게 하옵소서”(애 5:21). ‘다시’ 시작할 힘을 달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다시’는 아직 끝이 아니라는 선언이요, 회복의 시작점이렷다. 

시인 황선하는 ‘시든 꽃에 반하다’라는 시에서 ‘시들어가는 꽃을 보면 / 놀라지 않게 조심스레 다가가 / 입술에 닿은 깃털의 촉감 같은 목소리로 / “아직 햇빛이 반할 만하오”라고 / 속삭여주어야지’라고 노래했다. 다시 힘을 내보라고, 마지막 젖 먹던 힘을 발휘해 보라고 제안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옛날, 이삭이 다시 시작했듯이 오늘날 시인들이 다시 시도해 보라며 제안을 하듯이 우리도 다시 시작하면 된다. 우는 이도, 주저앉은 이도, 떨어진 이도, 아픈 이도, 상처 입은 이도, 돈 떼인 이도, 앞이 캄캄한 이도, 길 나서는 이도, 꿈을 꾸는 이도, 다시 또다시, 거듭 다시, 시작하면 된다. 아직은 햇빛이 반할 만하다고 햇살이 속삭이고 있으니.

소종영 목사

<가장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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