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철 목사님은 경남 창원군 웅천(熊川)에서 태어났다. 웅천의 옛이름은 곰내이며, 산에서 곰들이 내려와 냇물을 먹고 가는 곳이라해 웅천(熊川)이라 불렀다고 한다. 맑은 냇물이 흐르는 웅천은 1900년 어간에 동학과 기독교가 거의 같은 시기에 들어온 신앙심이 깊은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동네였다. 1897년생인 맑은 소년 주기철도 성장하면서 웅천교회 주일학교에 출석해서 성경을 배웠다. 독립운동가였던 조만식, 이승훈, 류영모 선생 등이 교사로 있었던 기독교계 민족주의 사립학교였던 오산학교에서 기독교민족주의 교육을 받은 주기철은 1916년에 오산학교를 졸업한다.
고향 웅천에 돌아와 있다가 1919년 3.1운동때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게 되지만 1922년에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수학후 1925년 제 19회로 졸업함과 동시에 목사안수를 받고 1926년 1월에 부산 초량교회 당회장으로 취임한다. 차분한 목회로 200명 교인이 4년 만에 400명으로 늘어나게 되었으나 노회 중진들의 마산교회 문제 해결 요청으로 1931년에 마산교회 당회장이 되고, 1932년에는 경남노회장으로 선출된다. 마산교회 분규를 해결하고 재선으로 2년간 역임한 경남노회장의 직무도 훌륭하게 완료한 주기철 목사님은 뛰어난 교회행정가이기도 하지만 명설교가로서도 인정을 받고 노회와 총회에서 영향력있는 목사로 부각된다.
이 당시의 주기철 목사님의 목사관은 분명했다. 즉, 민족주의자가 국가와 민족을 위해 살고, 사회사업가가 사회를 위해 살 듯 목사는 오직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떼를 위해 사는 존재이다. 목회자에게 ‘민족’이 신앙과 삶의 중요한 관심사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을 전업으로 삼는 민족운동가일 수는 없다. 목회자가 ‘사회’에 관심을 두는 것은 당연하지만 목사 자신이 사회사업가는 될 수 없다. 목사가 민족이나 사회문제에 관심을 표하고 때론 참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양떼를 돌보아야 하는 목사의 궁극적인 목적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었다. 1936년에 1천 명이 넘는 교인을 수용하기 위한 새예배당 건축문제로 교회분규에 휘말린 평양의 산정현교회 당회와 조만식 장로 외 주변 인사들이 주기철 목사님의 청빙을 강하게 요청함에 따라 그해 7월, 평양노회 이명을 거쳐서 산정현교회로 부임하게 된다. 부임한지 1년 2개월만에 교인들의 화합을 이끌어 내고, 평양시내가 한눈에 내려보이는 산정재 언덕에 새예배당을 건축해 입당할 수 있도록 한 주기철 목사님의 탁월한 리더십은 평양과 전국교회,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일반사회에서도 인정받게 되고 평양노회 부노회장에도 선출된다.
이때는 중·일전쟁이 발발(1937년 7월)해 ‘전시상황’이란 이유로 일제의 조선총독부가 신사참배를 비롯한 황민화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기독교계 학교와 교회에도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던 상황이었고, 교회는 조선총독부의 요구에 대해 순응이냐 저항이냐를 선택해야 하는 기로에 서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 목사님은 예배와 집회에서 교회와 총회가 신사참배에 반대, 저항하는 참생명의 길, 옳은 길을 선택할 것을 촉구했다. 이러한 행보는 조선총독부와 ‘친일노선’을 취하고 있던 기독교계 지도자들에게는 ‘비타협적 원칙론자’인 주 목사님의 지도력과 영향력이 교회안에 확장, 파급되는 것이므로 달갑지 않게 여겨졌고, 본격적으로 일제 경찰당국의 감시와 탄압을 받게 되는 노출의 배경이 된다.
주기철 목사님은 1938년 봄에 평양노회 부노회장으로 재임시 신사참배 반대에 대한 1차 검속으로 구속된 후 다시 8월에 경찰당국이 조작한 ‘농우회 사건’으로 재차 구속을 당한다. 그 시기에 평양노회와 교단 총회는 각각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임원들이 신사에 참배한다. 더 나아가 다음해 1939년 평양노회는 신사참배 반대로 계속 저항하다가 2차 검속된 주 목사님에 대해 목사직을 면직파면시키는 결의를 하고 일제 경찰당국과 함께 산정현교회를 폐쇄한다. 그 후 주 목사님은 한차례 구속에서 풀려나와 평양 주변 육로리 셋집에서 교인들과 ‘광야 설교’를 이어가고 신사참배 모임을 이끌면서 신앙의 양심과 지조를 지켜나갈 수 있기를 기도했다. 이 모습을 지켜볼 수 없었던 조선총독부는 또다시 신사참배 반대운동 인사 탄압 체포시 주기철 목사님을 평양경찰서가 검속하고 이어서 평양형무소로 이감한다. 일제는 옥중에서 계속 악랄하게 온갖 고문과 협박으로 신사참배에 동의하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주 목사님은 이에 굴복하지 않고 3년 7개월 동안 말로 형용할 수 없이 처절하게 고초를 겪으시다가 끝내 1944년 4월 21일에 옥사한다. 시신은 평양서광중학교 앞 공터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평양 북부 대동군 돌박산 공동묘지에 묻히니 그의 나이 48세였다. 일제는 7년 동안 4차례 구속을 하고 감옥에서 잔인하고 무자비한 고문으로 주 목사님의 생명을 유린했다.
교단 총회가 제 77회 총회에서 제정한 6월 둘째주일의 순교순직자기념주일에 즈음해 주기철 목사님의 삶과 죽음을 되돌아 보고 오직 주님을 가슴에 품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던 주 목사님의 고결한 영혼의 소리를 듣고 다시 죽기까지 오로지 주님께만 충성하는 결의를 다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안영민 목사
<총회 순교자기념선교회 총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