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포화 속에 기록된 선교사들의 피난일기
1950년 6·25 직후 아담스 가문 편지 첫 공개
3년 전인 2023년 1월 4일부터 6일까지 아들 임성현과 함께 2박 3일간 미국 애리조나주 세도나에 있는 제임스 아담스 선교사의 네 번째 자녀인 조지(아담스 선교사의 셋째 아들)의 장남 Edward Ben Adams(이하 Mr. Adams)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서울국제학교의 설립자인 Mr. Adams는 1998년 10월과 2019년 9월에 가족들과 함께 대구제일교회를 공식적으로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당시 Mr. Adams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국을 직접 방문할 수 없었지만, 아담스 선교사와 그 가족들에 대한 자료를 일부 소장하고 있다는 소식과 추가 자료를 찾게 되면 대구제일교회 부설 대구기독교역사관에 기증하겠다는 말씀에 저희가 세도나에 위치한 Mr. Adams의 집을 찾게 되었습니다. 특히 Mr. Adams는 생전에 사후 한국에 묻히기를 소망하며 대구제일교회 부활동산에 안장 되기를 원한다는 뜻을 밝힌 바 있어, 아담스 가문과 대구제일교회의 깊은 인연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건네받은 여러 자료 가운데 아담스 선교사의 첫째와 셋째 며느리가 각각 가족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원본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에 있던 선교사들의 피난 과정을 상세히 기록해 미국에 있는 아담스 가족들에게 전한 편지로서 한국전쟁 발발 초기의 생생한 상황을 담고있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처음 방문 당시에는 73년의 세월이 흐른 편지였기에 아들(임성현, SUNY Albany 영문학 박사 과정)이 번역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 확인할 내용들이 많았습니다. 가족 간에 주고받은 편지인 만큼 등장인물의 이름이나 단어가 약자로 표기된 경우가 많았고, 정확한 해석을 위해서는 당시의 배경지식이 필요한 대목들도 있었습니다.
올해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며, 한국전쟁 발발 76주년을 맞는 뜻깊은 시기입니다. 이번에 소개하는 두 통의 편지는 한국전쟁 발발 직후 선교사들이 직접 기록한 것으로, 전쟁의 혼란 속에서 선교사들이 겪었던 피난과정과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생생하게 전해 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이 편지는 2023년 6월 대구제일교회 「물댄동산」을 통해 처음 공개한 바 있습니다. 이후 보다 많은 분들과 이 자료를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뜻에 따라 한국장로신문에 다시 공개를 요청드리게 되었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한국전쟁 당시 선교사들이 겪었던 어려움과 하나님의 보호하심 가운데 이어졌던 피난의 여정을 전국 3만 6천여 장로님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또한 전쟁의 혼란속에서도 복음의 사명을 놓지 않았던 선교사들의 믿음과 헌신을 다시금 되새기는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아울러 대한민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헌신했던 수많은 선교사님들과, 특별히 아담스 선교사 가문의 헌신과 섬김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임병규 장로( 대구제일교회)
편지1 : Susan(=Sue) Comstock Adams 의 편지
버클리 수신됨 1950년 7월 8일 / 일본 후쿠오카, 1950년 6월 29일
사랑하는 아들들, 도로시, 그리고 모든 아담스 가족들에게. 급히 몇 자 적는 것으로 편지를 시작합니다. 네드는 한국(부산)에 남기로 다시 한번 결심했습니다. 이번엔, 서울로 올라갈 수 있게 되기 전까지 대구로 가서 머무를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요. 저도 함께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은 줄 잠깐 착각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모든 여자들은 떠나야만 했거든요. 호레이스와 존 언더우드, 그리고해리 힐은 대구에서 청주로 돌아갔고, 네드와 아치 캠벨, 그리고 프랜 킨슬러는 부산에서 대구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필요하다면, 그들은 비행편이나 배편 중 이용 가능한 편으로 빠져나올 수 있겠지요.
지난 주일, 북한의 공격이 시작된 날, 서울에 남아 있다가 거기서 탈출한 겐소 씨를 제외 하고, 우리 선교단 식구들은 선교사 연례회를 위해 대천 해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 더할 나위 없는 날씨와 안식일을 허락하셨고, 스미스 박사님의 설교로 진행된 예배, 그리고 석양예배도 허락하셨습니다. 석양 예배 시간에 네드는 대학 진학을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는 헬렌 킨슬러에게 선교단을 대표해 성경 한 권을 전해주기도 했습니다. 우리 중 일부는 토요일 저녁 서울에서 차를 몰고 내려온 감리교 신혼부부의 두 번째 웨딩 케이크를 먹어 치우는 일에도 초청을 받았지요. 밤11시경 언덕을 내려와 숙소로 돌아올 때, 지프차 한 대가 우리를 지나쳐 쏜살같이 지나가더군요. 잠시 후 밥 킨니가 와서 북한군이 침공했으며 서울 근처에서 목격되었다는 소식을 전했습니다. 사실 계엄령하에 밤 9시부터 통금이 시작되었고, 따라서 아무도 이동해서는 안 되었지만, 우리에게 경고해 주고 자기 가족들을 데리고 가기 위해 그는 그 시각에 경부선을 벗어나 대천 해변까지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소식을 듣고, 우리들은 에디가 가지고 있던 배터리 라디오를 즉시 작동시켰고, 불침번을 세웠습니다.
다음날 아침 8시, 프랭크 밴하트가 와서 지금부터 한 시간 내에 부산으로 떠나야 한다고 알렸습니다. 각자 가방 하나와 물 약간, 크래커 등등을 챙겨 들었지요. 친절한 한국인 요리사가 새벽 2시에 빵을 준비해 주어 우리는 따뜻한 빵과 함께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간이침대의 매트리스를 트럭 바닥과 양옆에 깔았고, 스테이션 왜건, 그리고 4륜 지프차에 짐과 사람을 가득 실은 채 출발 준비를 했습니다. 결국 보켈 선교사의 스테이션 왜건은 시동이 걸리지 않았지만, 1946년식 포드 ‘올드 페이스풀’은 대전까지 험난한 도로와 가파른 고개를 넘는 일정을 잘 견뎌 주었습니다. 우리가 대전에 도착하니 저녁 6시 반이더군요.
당시 우리 일행은 다섯 명의 감리교 선교사 및 킨니 가족들을 포함해 모두 서른 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병영식당에서 간단한 저녁식사를 했고, 다음날 부산행 기차를 탈 수 있을지 모른다고 들었기 때문에 바닥에 매트리스를 깔고 아이들을 눕혔습니다. 당시 국무부와 연줄이 닿은 에몬스 씨가 대전에 와 있었는데, 그에게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에몬스 씨는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를 위한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파견되었는데, 그가 다시 연락을 취해보니, 서울의 상황이 호전되어 대통령은 서울에 남기로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 밤 11시에 네드는 기차역에서 돌아왔고 11시 30분에 네드와 저는 마지의 거실 바닥에 몸을 눕혔습니다. 다른 이들이 침대에 누우라고 강권했지만, 저희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더 침대에 누울 필요가 있었거든요. 그리고 곧이어 자정에 우리는 “곧장 차로 이곳을 떠나야 한다”라는 통보를 받았습니다. 공산군이 동해안에 상륙해 대구로 밀고 내려오고 있었고 그때부터는 시간 싸움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우리는 대구에 도착해서 선교사지구로 올라가 한시간 가량 나무 아래에서 요기를 했습니다.
화요일, 우리는 새벽 한시부터 열심히 차를 몰고 내달렸습니다. 오전 일곱시 삼십분이 되자, 올드 페이스풀은 도중에 퍼졌고, 우리는 짐을 다른 차에 쑤셔 넣었습니다. 네드와 저는 결국 두 대의 5인승 지프차에 각각 여섯 번째 탑승자가 되었습니다. 여행 가방은 대전에 버리고 왔지만, 우리들 각자는 약간의 주스와 우비, 또는 각자가 선택한 물품들을 조금씩 들고 있었습니다. 화요일 이날의 피난길은 가장 고된 일정이었지만,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이 여정 내내 함께하셨습니다. 팬 이모님의 오차드 프로젝트를 위한 트럭은 35명의 어린아이들과 여성들을 안전하게 실을 수 있었고, 조지는 트럭 운전을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한 번은, 트럭을 비우고 모두의 기도와 환호 속에 심하게 망가진 다리를 달려 넘은 적도 있었지요. 또한 밤중에 길게 우회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 덕택에 한 트럭 가득 찬 아이들이 다른 다리를 건너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바로 직전에 대전에서 세 명의 군 관계자들과 짐을 마지막으로 싣고 나오던 작은 군용 수송차가 지나갔던 그 다리 말입니다.
우리는 결국 그 개울을 걸어서 건널 수 있었습니다. 가뭄 덕택에 수십 개의 개천들이 말라 있었기 때문이죠. 다수의 타이어 펑크가 있었으나 수리해 바람을 넣기도 했습니다. 결국 모든 차들이 꽤나 혹사를 당했습니다. 대구에 도착할 때쯤, 1마일 정도 남겼을 때 우리가 탄 군용 지프차의 한쪽 바퀴는 다 드러난 휠로 겨우 달리고 있을 정도였지요. 2시간 걸리는 부산으로의 특별 편성편 열차가 오기 직전, 우리는 대구의 운전기사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네드와 나머지 사람들에게 열차에서 작별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러나 우리는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습니다. 아직까지 아무도 송도에서 붙잡혔다는 5명의 감리교 선교사들의 소식에 대해 들은 바는 없습니다. 남장로교회 사람들은 화요일 밤까지 아직 부산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만 줄여야겠습니다. 우리 일행이 막사에서 군부대 내 다른 장소로 옮겨가야 한다고 하네요.
사랑을 전하며, 수.
편지2 : Margie(마지)의 편지
일본, 후쿠오카, 사랑하는 모두에게, 마지. 1950년 6월 29일
전심으로 감사드릴 일이 많네요. 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모두 대천 해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주일 자정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가다가 우리에게 들린 밥 킨니에게서 첫 번째 소식을 들었습니다. 에디가 해변으로 올때 라디오를 소지하고 있었기에 우리는 즉각 라디오를 작동시켰습니다. 라디오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려주는 유일한 창구였습니다. 남성들은 2시간 교대로 즉각 불침번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다음날, 월요일 아침에 많은 사람들과 아이들이 일어나 사건의 전모를 듣게 되었습니다. 아침 식사 후, 간단한 지도부 회의가 있었고, 그리고 전체 인원 모임이 있었으며, 우리 모두는 즉각 출발 준비를 하게 되었습니다. 아침에 프랭크 밴하트가 뛰어 들어왔습니다. 전보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그는 서울에서 지프차를 타고 자정에서 새벽까지 차를 몰아 내려왔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즉각 대전, 그리고 부산으로 피난 가야 한다고 알려왔고 피란 행렬의 선두에서 호송을 맡았습니다. 우리는 대천 경찰서에서 대전까지 타고 갈 두 대의 트럭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대전에 도착해 우리는 식사를 했고 밤 11시 30분에는 우리 집과 병영식당에 흩어져 각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월요일 자정쯤, 모두에게 즉각 대구로 대피하라는 명령이 서울에서 떨어졌습니다. 공산군이 동해안으로 상륙하고 있었고, 그렇게 되면 남한이 곧 둘로 나누어질 것이기에, 그전에 남쪽으로 내려가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에게 트럭과 지프차가 있었던 것이 얼마나 감사했던지요.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모두 함께 떠날 수는 없었을 겁니다. 대전에서는 트럭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빌렸던 두 대의 트럭은 모두 대천으로 돌려보내야만 했습니다. 두 대의 지프차에는 짐을 가득 실은 트레일러가 달려 있었습니다. 곧 짐을 치우고 사람들을 가득 실었습니다.
가는 내내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계속해서 짐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보켈 선교사의 차량은 시동이 걸리질 않아 해변에 두고 와야만 했습니다. 네드의 스테이션 왜건은 대전에서 대구로 이동하던 중 버리고 왔습니다. 한 번은 차가 멈췄는데 한 시간이나 일정을 지연시켰지 뭡니까. 반드시 대구로 내려가야 했기에 또 한번 위험을 무릅쓸 순 없었습니다. 또한 높은고개를 넘어 돌아가느라 6시간이나 일정이 지체되기도 했습니다. 도로가 유실된 곳도 있었고, 다리 한 곳에서는 트럭이 지나갈 수나 있을까 걱정될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기적이 었지요. 대전에서 온 군용 트럭과 트레일러가 다리를 돌파했지만, 전복되고 말았거든요. 심각한 피해는 없었지만, 아이들이 가득 찬 트럭이 그랬었다면 심각한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새벽 1시 30분에 대전을 출발해, 대구에는 오후 3시 30분에 도착했습니다. 길은 험했고, 먼지에 비좁은 공간 때문에 매우 고된 일정이었지만, 모든 아이들은 놀랍게도 일정을 잘 견뎌 주었습니다. 대구의 잔디밭에서 급히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씻고 나서, 5시 30분에 부산으로 가는 화물기차와 객차를 타러 갔습니다. 열차 여행은 이전의 여정에 비하면 무척이나 쾌적했습니다. 부산에 밤 10시 30분에 도착해 배를 타고 일본에 3시 30분쯤 도착할 수 있었지만 7시가 될 때까지 배에서 내리지는 못했습니다. 땅을 다시 밟고 군인들이 우리를 데려 갈 때는 날아갈 듯 했습니다. 앉을 수 있는 간이침대와 주스, 우유, 도넛도 있었고, 군인들이 작은 아이들과 가방도 들어 옮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적십자에서 나와 우리에게 타월, 비누, 칫솔, 치약, 면도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특히나 조지는 트럭을 운전 하느라 매우 지쳐있었고, 그동안 면도도 못했기 때문에 면도기가 꼭 필요했었지요. 즉, 우리가 구호물자를 나눠주는 대신, 수혜자가 된 것입니다. 느낌이 묘하더군요! 이제 우리는 넓은 리셉션 센터에 와 있습니다. 이후에 휴양시설로 가서 일주일이나 열흘쯤 머무르고 존스미스 씨의 도움과 조언을 따라 어떻게 할지 결정하려고 합니다. 스미스 씨는 우리와 줄곧 함께 있었는데, 정말 다행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를 우리 곁에 붙여 주신 하나님의 섭리에 감사드리며, 그가 우리와 더 머무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분 덕에 우리는 하나로 뭉칠 수 있었고, 의기투합할 수 있었습니다. (에드의 덧붙이는 말 – 존 코 벤트리 스미스 박사는 당시 한국 담당 이사회 간사였고, 대천 해변의 연례회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 체류 중이었음)
네드, 킨슬러, 캠벨, 힐, 그리고 호레이스와 존 언더우드, 이렇게 여섯 명은 대구로 돌아가기 위해 부산에 남았습니다. 가능하다면, 청주, 그리고 서울까지도 돌아갈 수 있길 소망하고 있습니다. 지금 밖에 비가 옵니다. 아이들을 위해 우비를 챙겨왔더라면 좋았을 텐데요.
지금으로선, 우리가 지니고 있는 것밖에는 없지만, 대천 해변에 두고 온 몇 개의 가방들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배에서, 방수/방풍 모자를 몇 개 얻을 수 있었고, 조지를 위해 셔츠 한 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제 곧 버스를 타고 이동한다고 하니, 편지를 급히 마무리해야겠습니다. 모두들 괜찮습니다. 에디는 해변에서 3일간 앓아누워 설파제를 먹고 있었지만 이제는 괜찮습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약간의 크래커와 주스, 물만 먹고 비규칙적인 식사를 하며, 일정 내내 잠은 부족했지만, 이 모든 기간 동안 모두들 잘 버텨준 것 같습니다. 적어도 우리 가족들은요. 저는 이제 방해받지 않고 푹 잘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모두들 기도하고 있을 줄 압니다.
넘치는 사랑을 전하며, 마지.

6.25 전쟁 발발 12시간 후 한국 선교부 가족 일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