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있으면 6.25다. 사람들마다 전쟁의 아픈 기억을 지니고 살다가 세월이 가며 잊히고 희미해져 이젠 할 얘기들도 많지 않을 터인데 내게 한 가지 또렷한 것이 있다. 그건 기찻길 철교 위를 걷던 작은 모험이다.
1950년 9월 15일 오전 나와 두 누이는 서울 종로구 가회동을 출발해 14일간을 걷고 걸어 9월 29일 전남 강진읍 서성리 고향집에 도착했다. 인민군 점령 중의 천리 여정은 주로 곧은 기차선로를 따라갔는데 폭격을 피해 열차는 밤에만 다니기에 낮에 걷기에는 좋았지만 그 중간중간에 걸쳐 있는 철교들이 난관이었다.
처음에는 세 소년 소녀가 아래로 뻥 뚫린 침목과 침목 사이를 말 그대로 기어서 건넜다. 철교 저 밑으로 물이 흐르기도 해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강을 만나면 나룻배를 얻어 타고 물을 건넜다. 그러다가 점차 자신이 생기자 다리 위를 성큼성큼 걷게 되고 나중에는 동네 아이들처럼 달려서 건넜다. 사람의 학습, 훈련 능력은 과연 놀라운 데가 있다.
그때 나는 국민학교 5학년에 다녔다. 바로 위 형은 6학년이었고 누이들은 여중생, 맏형은 대학 1학년. 5남매가 같이 내려가다가 폭격이라도 만나 함께 다 죽으면 안 되니 두 팀으로 갈라서 형 둘은 몇 날 먼저 떠났고 나머지 셋은 고향 사람들 무리에 섞여 뒤에 출발했다.
시골 의사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신 우리집은 해방 직후 어머니가 아이 다섯을 데리고 친정이 있는 서울로 올라와 가회동에 정착했다. 6월 24일 어머니는 고향의 전답에서 나오는 소작료를 받아오려고 호남선 기차로 시골집에 내려가셨는데 그 다음날 일요일 새벽에 전쟁이 터졌다.
머릿속 기억방의 테이프를 돌려 보노라면, 어린 삼 남매가 가엾어서 김이 무럭무럭 나는 밥을 실컷 먹여주던 후덕한 집들도 있었고, 때마침 추수철이라 전쟁 중이라도 시골 인심이 그리 각박하지는 않았다. 교회도 다니지 않는 우리를 하나님이 동행하시어 두 주일 만에 터벅터벅 고향동네에 들어설 수 있었다. 어머니는 거지꼴을 한 아들 딸을 끌어안고 그냥 엉엉 우셨다.
인민군 부대는 철수를 하고 아직 국군 진주 전이라 지역 공산당이 우익인사들을 학살하느라 날뛰었다. 토담을 사이에 둔 옆집은 영랑 김윤식과 시문학파 활동을 함께 하던 조카뻘 김현구 시인이 살았다. 고생하고 내려왔다고 잘 익은 감류(단맛이 진한 석류)를 두 알 따서 담 너머로 던져주고는 곧바로 마을 공산당에게 끌려가 살해당했다. 동네 곳곳에서 비명과 통곡이 터져 나왔다.
나의 전쟁경험담은 더 큰 고난을 겪은 사람들의 6.25 회상 앞에 한갓 동화 한 토막에 불과하다. 침략전쟁을 일으켜 수백만에 참담한 비극을 안긴 북의 독재자 손자는 이제 와서 50개가 넘는 핵탄두를 쓰다듬으며 무슨 ‘적대적 2국가’론을 운위하고 있다. 하나님의 응징이 다가온다.
김명식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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