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은 신앙의 자리] 의사의 길 넘어 민족의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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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기득권 내려놓고 만주로… 의술과 교육으로 독립운동과 동포사역 헌신

박서양 ②

박서양은 의사이자 교육자로 자리잡은 뒤에도 자신의 삶을 안락함에 머물게 하지 않았다.  국가가 몰락하고 일본의 식민지 체제에서 국민들이 절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역시 신지식인으로서 모르는 척할 수만은 없었다. 

1917년 돌연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망명의 길을 택했다. 당시 상황에서 만주는 여러 가지 면에서 특별한 곳이었다. 그는 서울에서 주어진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 만주라고 하는 척박한 곳, 그렇지만 일본에 대항해 독립군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곳으로 갔다. 그는 그곳 용정에서 ‘구세(救世)의원’이라는 병원을 운영하면서 ‘숭신(崇信)소학교’를 세워 자신이 교장으로서 아무런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있는 동포의 자녀들을 직접 가르쳤다. 

혼자서 감당할 수 없기에 교사 5명을 초청해서 학교를 운영하게 했다. 연길현에 산재해 있는 작은 규모의 27개 학교가 연합해서 조선인의 정체성과 민족의식을 이어갈 수 있도록 연합운동회를 주선했다. 뿐만 아니라 출신성분이나 지역과 관계없이 우수한 학생들에게는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도와주었다.

1923년 간도 지역의 조선인학교들의 운영자들이 함께한 간도교육협회에 참여해서 박서양은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동포 자녀들의 교육을 이끌었다. 1924년 연합운동회에는 48개 학교가 참석했으니, 한국인들의 자녀교육의 열의가 대단한 것은 특별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많은 학교가 참여할 수 있도록 박서양의 역할이 컸다. 이러한 현실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던 일본 영사관은 숭신소학교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1929년 숭신소학교 학생들이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연길시내에서 만세 시위를 하다가 20여 명이 체포되었다. 

이어서 1931년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2년 윤봉길 의사의 의거사건이 있은 직후 숭신소학교는 일본 영사관이 임시로 폐교시켰다가 잠시 복교되었으나 1935년 완전히 폐교시키고 말았다.

지역이 지역이니만큼 박서양은 의사로서 주변에 치료를 받을 수 없는 환경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질병에 걸린 독립군들을 치료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조선인을 치료하는 것은 물론 만주 지역 독립무장투쟁단체인 대한국민회 군사령부 군의관으로 임명되어 활동했으니, 박서양의 만주에서의 활동은 일본군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학교가 폐교되자 1936년 귀국해 본가가 있는 황해도 연안에서 개인 병원을 개원해 운영하다가 1940년 지병이 악화되면서 고양군 은평면 수색리에서 별세했다.

그러나 그에 대한 기록과 자료가 없는 관계로 지금까지 박서양이 백정의 아들로 의사가 되었다는 정도가 확인되었을 뿐이었다. 그랬던 것이 2000년에 들어와서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박형우 교수가 발굴해 냄으로써 세상에 그의 행적이 조금 알려졌고, 2005년 박서양의 손자가 이민을 갔던 칠레에서 귀국하면서 확실하게 알려졌다. 하지만 가족사정도만 알 수 있을 뿐 박서양의 업적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상태이다. 

이렇게 박서양은 엄격한 신분제도가 무너지는 과정의 주인공으로 살아내야 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을 여전히 백정의 후손으로 보려는 현실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면 어디든 마다하지 않았으며, 복음을 통해서 거듭남이 없이는 사회적 변화조차도 어렵다는 현실을 파악하고 복음전도에도 열심을 다했다. 

또한 의사로서 그가 왜 만주로 떠났는지 그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어쩌면 그를 필요로 하고,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보람된 일이 그곳에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여기 승동교회는 백정의 교회라고 일컬을 만큼 사회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또한 그 중심에 박성춘과 박서양이 있었다. 그들을 기억해야 하는 것은 단지 그 이름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일어났던 사회적 변화와 그 중심에서 감당했던 그들의 섬김의 삶이 아닐까?

이종전 박사

<인천기독교역사문화연구원 원장, 개혁파신학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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