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회복] 신사참배 거부 운동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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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식민 통치시대 후반, 1935~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한국 교회의 특기할 만한 사건은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다. 세속 권력을 절대화하고 일본 국왕을 신격화해 참배를 강요하는 만행으로 신앙의 자유를 유린하는 박해였다.

처음에는 학교 교육과정을 개편해 국왕을 숭배하도록 하고 국왕의 생일(生日)에는 학생들이 일장기(日章旗)를 들고 ‘천황 폐하 만세’를 외치도록 강요했다. 이는 신사 참배 강요로 가기 위한 사전 포석이었다. 한국의 젊은이들의 민족의식을 제거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정당화해 한국인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 만들고자 함이었다. 

천황의 신격화와 함께 외경(畏敬)과 경애(敬愛)의 이념을 국민들에게 요구했다. 총독부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우선 순위에 미션(Mission) 스쿨을 두었다. 그 다음이 공립학교였다.

1920년 선교사 선교회는 “우리는 기독교 학교의 학생으로 하여금 천황 숭배를 행하는 의식에 참여해 천황 사진 앞에 경례를 하라는 명령에 대해서 일체 이를 반대, 거부한다. 천황을 신격화(神格化)해 경배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요구가 없기를 바라는 바이다” 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총독부에 제출했다. 

매큔(McCune) 선교사는 “천황을 존경할 수는 있지만 그를 숭배하는 신사참배는 신앙 양심상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총독부는 학교 폐교(廢校) 문제까지 들고 나왔다.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는 기독교 신앙의 굴종(屈從)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참배해서는 안된다”고 했다.  

장로교 27회 총회는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결정을 하게 되었다. “신사(神社)는 종교가 아니므로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다. 신사참배는 애국적 행위이며 이에 신사참배를 함으로 국민 정신 총동원에 참가하며 비상 시국하에 황국신민으로서 충성을 다하기로 한다.” 선교사들은 “신사참배 가결은 하나님의 말씀 위반이고 장로교 헌법과 규칙 위반이며 이번 처사는 보통 회의법에도 위반이다.” 25명의 선교사는 총회에 항의서를 제출했다. 그 후 신사참배 거부 운동이 전 교회적으로 일어났다. 

평양에서는 주기철, 주남선 목사, 신의주에서 이기선 목사, 경남에서 한상동, 조수옥,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목사 등을 중심으로 일어났다. 일제의 탄압에 의해 200여 교회가 문을 닫고 2천여 성도가 투옥되었으며 50여 명의 교역자가 순교를 했다. 평양 산정현교회 주기철 목사의 “일사각오(一死覺悟)” 설교와 순교는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 신사참배 거부 운동은 가장 고귀하고 순결한 신앙의 정수(精髓)이다. 지켜야 할 영적 마지노(Maginot) 선이다.

장로교 27회 총회에서 신사 참배 결의를 이끌었던 총회장 홍택기 목사가 해방 후에 했던 말이다.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해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다.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 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둔 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기가 막힌 말이다. 참회하는 마음을 전혀 찾아보기 힘든 모습은 우리를 더욱 부끄럽고 분노하게 한다. 1945년 8월 15일 드디어 해방을 맞이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이 연합국에 협력, 도울 것을 염려해 1945년 8월 18일 한국교회 지도자 2만여 명의 학살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던 조선 총독부였다. 대학살 3일을 앞두고 우리 민족, 우리 교회가 해방되었다.

김용관 장로

<광주신안교회·한국장로문인협회 자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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