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끝없는 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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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은 불행의 시작입니다.’ 지난주일 예배 설교 제목이다. 에베소서 4장을 본문으로 하여 목사님은 성도들에게 각자가 지닌 갖가지 욕심과 욕망을 놓아 보내 심령을 새롭게 하고 거룩하고 정직한 존재로 거듭나기를 힘써 권면하였다. 그리고 나와 교역자와 교회가 어떻게 욕심에 사로잡혀 오늘날 수많은 허물의 주인공이 되었는지를 함께 돌아보자고 했다.
욕심은 죄를 잉태하고 그것이 장성하여 사망에 이른다고 성경은 경고하는데, 악한 방향이 아닌 바람, 즉 소원, 소망, 희망은 인생의 동력이 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양심을 심어주시어 무엇이 의와 진리를 향한 행위이고 무엇이 죄를 낳는 일인지를 알게 하셨으므로 버려야 할 욕심을 품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책임임을 목사님은 강조한다. 그런데 욕심의 발생과 유혹을 거부하는 것, 이미 내 안에 들어와 있는 것을 내쫓는 것은 한번의 기도로 되지 않는다. 죄악에까지 이르지 않더라도 단순한 인생의 불행으로 인도하는 욕심이 너무 많으니, 설교는 이쪽에 더 큰 의미가 있지 않은가?

학교 다닐 적에 읽은 토마스 하디의 단편소설 「아내를 위하여」가 왠지 설교 말씀이 새겨진 머리에서 맴돌기에 다시 찾아본다. 헤이븐풀 포구에 나타난 청년 뱃사람이 마을의 두 처녀와 사귀게 된다. 샤드락은 조금 더 정이 끌리는 에밀리를 놔두고 더 키가 크고 살림도 나은 조안나와 결혼해 두 아들을 낳고 바다에 나가는 대신에 자그마한 가게를 열고 정착한다. 에밀리도 곧이어 마을의 홀아비와 맺어지는데 이 사람이 돈을 잘 벌어 조안나의 가게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집을 짓고 역시 아들 둘을 낳고 살게 된다.
에밀리를 부러워하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주려고 남편은 배를 타고 나가 몇 달 만에 자루에 돈을 가득 담아 돌아왔다. 하지만 아내는 ‘에밀리네는 수천 파운드를 만지는데 우리는 수백 파운드를 세고 있어요. 당신 나가 있는 동안 저 집은 말 두 필짜리 마차를 들여 놨다우’ 하면서 ‘우리 애들은 저 집 배에서나 일하고 살아야 겠네요’ 하고 팔자를 탓한다. 얼마 후 남편은 큰 결심을 하고 이제 크게 자란 두 아들을 배에 태우고 먼 바다 항구들을 도는 장사 길에 나선다. 한 해가 가고 두세 해가 지나도 남편과 자식들에게서는 아무 소식도 없다. 에밀리 집에 기식하게 된 조안나는 어느 날 밤 바깥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는 듯해 맨발로 뛰쳐나가지만 아무도 없어 돌아서는 것으로 소설은 끝을 맺는다.

조안나의 욕심은 착한 남편과 두 아들이 깊은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한 세기 넘게 지난 오늘에도 이 땅에는 조안나와 같은 수많은 남녀들이 명예와 재물과 성적 탐닉과 자녀의 미래에 대한 보장을 얻기 위해 무리한 노력을 기울이며 자기자신과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수치와 파멸로 몰아간다. 우리들의 양심은 죄악의 범주에 대하여 똑똑한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그 바탕이 되는 갖가지 욕심에 대하여는 마치 용광로 앞의 촛불처럼 스스로를 상실함으로 아무 구실도 못하고 만다.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라 생각된다.

김명식 장로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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