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위셔트(Geonge Wishart, 1513-1546)는 엘리자베스 리어몽의 아들로 태어나 애버딘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그 후 여러 학교를 거쳐 스코틀랜드에서 최초로 그리스어를 가르쳤으며, 몽트로스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그리스어와 신약성경을 가르쳤다. 그가 개신교에 대한 신앙을 중심으로 설교를 해서 1538년 브레친 주교에 의해 이단으로 기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스위스와 독일로 피신해 칼뱅파와 합류했다.
그 후 1544년 스코틀랜드로 돌아와 개혁에 대한 설교를 하면서 추기경을 비판해 결국 체포되었다. 그는 에딘버러의 레이스에서 설교를 하다가 붙잡혀 이단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위셔트에게 개혁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라고 했으나 이를 거부했다. 그래서 사형이 집행되던 날 아침 책임자가 위셔트를 식사에 초대해 위셔트 주머니에 화약을 넣어 주면서 위셔트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위셔트는 용서를 했다. 시간이 되어 성 밖에서 화형이 집행되었다. 집행관이 그의 몸을 나무 기둥에 묶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오 세상의 구주이신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하늘의 아버지여 당신의 거룩하신 손에 내 영혼을 맡기나이다.” 그리고 “하늘의 아버지여 저들의 사악한 마음과 무지와 거짓으로 내게 죄를 지었음을 용서해 주옵소서”라고 했다.
이때 집행관이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받았다. “선생님, 나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당신의 죽음에 대해 아무 죄가 없습니다”고 했다. 이때 위셔트는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면서 “이것이 내가 당신을 용서하는 내 마음의 징표”라고 하면서 “당신의 임무를 수행하시오”라고 했다.
이윽고 집행관이 불을 붙였다. 그래서 위셔트는 순교를 당했다. 그 후 이 사건으로 인해 스코틀랜드 장로회가 시작되었으며, 위셔트의 순교비가 세워졌다. 그리고 1548년 위셔트가 번역한 ‘스위스 신교의 신앙고백’이 유작으로 발간되었다.
김광식 목사<인천제삼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