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패에서 전도사로 변화된 김익두 목사 삶
폭력 대신 사랑… 예수 믿고 복음의 사역자
주인이 말하기를, “오늘은 그가 무슨 생각이 있어서 그냥 지나간 모양이나 다음 장날에는 우리 집은 망하게 되었다” 하면서 크게 걱정했다. 다음 장날이 되어 김익두가 그 집 앞을 또 지나가면서 하는 말이 “예수 믿으시오”라고 전도했다. “옛날 김익두가 아니고 새로 난 김익두올시다. 당신에게 지은 외상값은 후에 모두 갚아 드리겠소” 하자 주인은 무슨 영문인지 몰랐으나 크게 숨을 내쉬며 마음을 놓았다.
그 후로 그는 매서인이 되었다. 성경과 전도지를 손에 들고 집마다 방문하며 예수 믿으라고 전도하면서 성경을 팔았다. 스왈른에게 전도실력과 신앙을 인정받은 그는 28세인 1902년 신약종상(新藥種商)을 경영해 1년에 천 원의 수익을 올렸으나 재령읍교회가 전도사로 초빙하자 번창하는 약종상(藥種商)을 그만두고 월급 4원의 교역자 생활을 시작했다.
그가 재령교회에 부임했을 때 교인은 여자가 10여 명이고 남자는 단 한 명밖에 없는 빈약하기 짝이 없는 교회였으나 1년도 못 되어 여자 30여 명, 남자가 10여 명, 주일학교 어린이는 40~50명에 이르렀다.
그해 10월에 김익두 전도사는 스왈른 목사의 부탁을 받아 신천(信川)으로 옮겼는데 이때부터 “김익두의 신천”, “신천의 김익두”가 되었다. 1903년 신천 지역의 개척 전도사로 파송되었다. 신천에서도 그는 새벽기도, 신약과 구약을 하루에 각각 2장씩 숙독, 냉수마찰, 가정에서 하루 세 번 예배 등 자기의 원칙을 굳게 지켰다.
그리고 항상 손에 성경을 들고 틈나는 대로 읽었으며, 길을 걸을 때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습관이 생길 정도로 열중했다. 김익두는 1906년 3월 평양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10년 제3회로 졸업한 후 황해노회(黃海老會)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한번은 김익두 목사가 신천 서북교회에서 목회할 때 여름날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서 보따리를 메고 산을 넘고 있었다. 산을 넘다가 너무 덥고 힘들어서 산 위에 올라가서 웃통을 벗고 땀을 식히고 있었다. 그런데 맞은편에서 술에 취한 사람이 비틀거리며 올라오더니 김익두 목사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야! 인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어?”라고 시비를 걸더니 다짜고짜 주먹질을 했다.
그런데 김익두가 술 취한 사람이 때리는 것을 그냥 맞았다. 옛날 같으면 한주먹에 날려 버렸을 텐데 꾹 참고 때리는 대로 맞았다. 술 취한 사람은 뭐가 그리 신이 났는지 ‘이사 나간 집 굴뚝 부수듯이’ 김익두 목사를 마구 두들겨 팼다. 한참을 때리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상대방이 전혀 대항하지 않으니까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숨을 몰아쉬고 씩씩거리며 김익두 목사를 째려보았다.
그러자 김익두 목사가 말하기를, “형님, 다 때렸소?” 하면서 손을 내밀어 악수하면서 술 취한 사람의 손을 꽉 잡았다. 한때 평양 깡패였기 때문에 그 손이 무지막지했다. 술 취한 사람은 손이 아파서 번쩍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겁이 났다. 그때 김익두 목사가 술 취한 사람의 손을 꽉 붙잡고 한 유명한 말이 있다.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자네가 받았네!”
그 사람에게 “내가 바로 김익두네. 내가 예수 믿기 전이라면 자네는 오늘 여기서 장례식까지 치르는 건데 내가 예수 믿은 덕에 복은 자네가 받았네.” “아이고 형님, 그러면 저는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당장 날 따라와.” 그리고는 그 사람을 데리고 가서 부흥회에 참석시켰다. 술 취한 사람은 그날 예수를 믿고 술 주(酒)자, 주님(酒任)을 버리고 오직 살아 계신 주님(主任)을 믿어 나중에 장로가 되었다는 일화가 있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