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지에서 모든 것 다 내려놓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
“선교는 세상 살아갈 힘 얻는 나만의 충전방식”
원덕길 장로는 지난 9월 24일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린 총회 세계선교부(부장 서화평 목사, 샘물교회) 부서회의에서 해외 선교사 지원에 힘쓴 공로로 총회장 명의의 선교공로상을 받았다. 근 10년 안에 평신도가 선교공로상을 받은 것은 원 장로가 유일하다. 원 장로는 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부인 신부용 권사라며, 그동안 수많은 선교지를 대부분 동행하며 묵묵히 고생한 아내에게 공을 돌렸다.
원 장로가 지금까지 선교지를 방문한 것은 총 76회, 자비를 털어 세운 교회만 5개다. 선교에 특별한 관심도 사명도 없었던 원 장로가 사업보다 선교에 더 열과 성을 쏟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시무하는 안양제일교회 청년부장을 맡게 되면서부터였다.
“사실 제가 선교에 대해선 굉장히 무지했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제가 청년부장이 되고 나서 청년들과 함께 네팔로 선교를 가게 됐는데 그 일을 계기로 선교사역에 푹 빠지게 됐지. 이렇게 멋있는 사역이 있구나 하고 느꼈고 그 다음해부터 매년 선교지로 나가게 된 거예요.”
청년부장이 되고 난 뒤, 성공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각 나라로 출국 전 적어도 3개월 동안 청년들과 본격적인 사전 훈련을 했다. 원 장로가 청년부장을 맡고 있던 동안 진행된 단기선교사역은 항상 그렇게 진행됐다. 그래서일까. 원 장로가 청년부장을 맡고 있을 때 함께 선교훈련을 했던 청년들 중에는 신학 공부를 하고 목사 안수를 받거나 선교사가 된 사람들이 많다.
“내가 얼마나 무지했던지, 처음 네팔에 갔을 때 코르덴 바지를 입고 간 사람이에요. 선교사님께 물어보니 ‘그냥 오시면 돼요’ 하시길래 정말 그냥 갔지. 선교사님이 ‘장로님 조금만 들어가면 돼요’라고 하셨는데 그 ‘조금만’이 강을 몇 개 건너가는 거였어요. 물이 허리까지 오는 강에서 침례식을 했는데 여벌옷을 전혀 준비해 가지 않아서 그 두꺼운 바질 입고 강에 들어갔다가 밤이 되니 어찌나 추운지, 밤새 덜덜 떨면서 얼어 죽는 줄 알았어요. 그때 내가 수족냉증이 걸렸어요.”
네팔, 미얀마, 카자흐스탄, 남수단, 우간다 등 그동안 다녀온 수많은 선교지 중 가장 보람 있는 기억으로 남아있는 곳은 말레이시아 ‘살리리안’ 지역이다. 2006년도에 그 곳에 갔을 때 현지인들 말로는 그 지역에 들어간 외국인은 원 장로 일행이 최초라고 했다.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비포장도로를 한 20시간 정도 달려 들어가야 하는 그런 지역이에요. 100년 전에는 식인마을이었다고 하는데, 선교사님도 얘기만 듣고 들어가 보지는 못한 곳이었다고 했어요. 산을 넘고 카누 타고 강을 건너서 겨우 도착해서 보니 24가구가 모여 사는 작은 무슬림마을인데, 복음을 들은 사람이 없어요. 교회를 짓고 싶었지. 우리가 가서 복음을 전하니 하나둘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마을 추장이 방해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갈 때마다 그 추장에게 엄청난 공을 들였어요. 소 잡아서 동네잔치를 열고 그랬지. 그렇게 공을 들였더니 추장도 나중엔 마음을 열더라고. 작년에 가 보니까 두 가구가 이사 가서 22가구 남았는데 전부 다 완전히 복음화 됐더라고요.”
또 한 곳은 네팔 ‘세루통’이라는 곳. 해발 2200m, 3일을 걸어야 들어갈 수 있는 이곳에 2008년 교회를 세웠다. 원 장로는 올해 1월에도 이곳에 다녀왔다.
“세루통교회에 대해 소개하자면, 정말 신기한 경험을 했어요. 처음 그 지역에 갔을 때 참 매력적인 곳이라 여겨 내가 일행들에게 ‘여기서 집회 한번 합시다’ 했더니 현지 사역자들이 내게 ‘큰일 난다, 돌에 맞아 죽는다, 위험하다’고 해요. 산에 올라가서 그 마을을 내려다보니 내 마음이 무척 안 좋더라고. 그 자리에서 내가 ‘이 산지를 내게 주소서’ 하고 통성기도를 했어요. 이듬해 다시 네팔에 갔을 때 현지 사역자가 교회를 하나 지어달라고 하지 않겠어요. 내가 어느 지역이냐고 물었더니 그 친구가 우리를 데리고 들어간 곳이 바로 내가 기도했던 그 마을인 거예요. 순간 내 마음이 뜨거워져서 바로 ‘교회 짓자, 내가 돈을 내겠다’ 하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돈을 보내주었지요. 세루통교회가 세워지고 처음에는 그 마을 사람들이 외국인 구경하러 왔다가 점점 찬양 소리가 뜨거워지더라고. 지난 1월에 다시 세루통교회에 갔는데, 교회 강대상 옆에 큰 쌀자루가 있길래 무엇이냐고 묻자, 현지 사역자와 장로가 내게 와서 고맙다고 인사를 하지 않겠어요. 왜 그러냐니까 자기네 교회가 그 산골짜기에서 유일한 자립교회가 됐다면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그 교회에 현재 예배 인원이 300명 정도 됐어요. 예전엔 무당 같은 게 많은 마을이었는데 거의 다 없어지고 지금은 70% 정도가 복음화 됐어. 그런데 더 큰 감동은 그 마을에 살다가 일하기 위해 카트만두에 나가 사는 사람들 300여 명이 자발적으로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거예요.”
세루통 지역 인근에는 안양제일교회가 협력해 지은 교회만 10개가 넘는다.
선교사역을 시작한 것이 청년부장을 맡으면서부터이기는 하지만 사실 원 장로에겐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 올해로 95세인 원 장로의 어머니 유옥련 권사는 남편과 사별한 뒤 “이제부터 나는 선교한다”고 선언하시고는 69세부터 약 10년 동안 중국선교를 하셨다. 어렸을 적 중국어를 배운 경험으로 유 권사는 3개월 비자를 받고는 내내 중국에 머물다 돌아오시기를 반복하며 중국에 가정교회를 10곳 세우셨다. 연로한 모친의 건강이 걱정돼 자식들이 극구 말려도 어머니는 ‘거기서 죽으면 순교’라며 중국선교를 멈추지 않으셨다.
“대체 어머니가 매번 중국에 가셔서 뭘 하시는지 알아야 되겠다 싶어 한 번은 집사람하고 같이 어머니 선교하시는 곳엘 갔어요. 가서 보니 어머니가 정말 대단하신 거예요. 마치 옛날 선교사님과 같은 모습이랄까. 내가 청년부장을 맡으면서 생각했던 것이, 어머니가 그 연세에도 선교하시겠다며 그렇게 고생하셨는데 나도 뭔가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지요.”
원 장로는 간증할 것이 있다며 일화 하나를 소개했다. 몇 년 전 태국에 큰 쓰나미가 덮쳤을 때에도 원 장로는 선교사님을 돕기 위해 선교지를 찾았다. 18일 만에 태국에서 한국에 돌아왔을 때 원 장로는 경영하던 사업체 직원이 1800만원을 훔쳐 달아난 사실을 맞닥뜨려야 했다. 부인 신 권사는 가만히 원 장로를 위로하며 당분간 선교사역을 좀 쉬며 생업에 충실하자 권했고 원 장로도 사업에 소홀했던 탓이라 여겼다. 그런데 딸이 ‘아버지 좋아하시는 선교사역 계속 하시라’며 아버지의 사업을 돕겠다고 나선 것이다. 딸의 도움에 힘입어 선교사역을 다시 시작했더니 뜻밖에도 나라에서 국가유공자로 지정돼 잃어버린 돈의 10배에 가까운 보상을 받게 됐다.
국가유공자 지정은 원 장로가 군복무 시절 북파공작훈련을 받았던 공 때문이었다. 군대에서 많은 경험을 하게 됐는데 재미있는 건 그 경험들이 선교지에서 아주 유용하게 활용됐다는 사실.
“한번은 네팔에 갔을 때 산길에서 차가 막혀 꼼짝을 못했던 적이 있어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차가 오도 가도 못할까 답답한데, 그곳 사람들은 그저 앉아 마냥 기다리는 거야. 하도 답답해서 내가 차에서 내려 상황을 살펴보니 앞에서 수로 공사를 하고 있는데 기술이 없어서 할 줄을 모르는 거야. 내가 군대에 있을 때 그 작업을 했던 경험이 있어 우리 청년들을 지휘해서 한 시간 만에 해결했지. 그런 고락을 함께 하니 청년들과도 애정이 돈독해져요. 내가 선교지에서 청년들이 잘못하면 막 야단을 친다고. 하지만 내가 청년들과 똑같이 고생하고 앞장서는 모습을 보이니까 청년들도 나를 신뢰하고 따르는 거지. 내게 아버지라 부르는 청년들이 한둘이 아니에요.”
한번 선교지에 나가면 짧게는 열흘, 길게는 18일을 머물다 온다. 원 장로가 가는 곳들은 하나같이 생활이 불편하고 고생스러운 오지. 일 년에 여섯 차례 선교지에 다녀온 적도 있다. 지금까지 선교지에 나가있던 날들만 계수하면 천일이 넘는 시간이다. 하도 고생스러워 이번을 마지막으로 그만해야 겠다 싶다가도 한국에 돌아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금방 또 선교지를 가고 싶단다. 그 마음이 얼마나 크면 원 장로는 양쪽 무릎에 인공관절 수술을 하고도 네팔로 달려갔다.
“사람들이 나더러 미쳤다고 했어요. 속된 말로 선교는 중독과 같아요. 몸은 힘들고 고생스러워도 큰 보람을 느끼게 된다고. 마치 내가 충전이 되는 것 같은 기분이에요. 내가 교회 장로라고 해도 세상에 속해 살다보면 별거 없어. 그런데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전화도 인터넷도 되지 않는 선교지에 들어가 아침부터 밤까지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열흘 넘게 지내다 보면 무척 기쁘고 돌아와서는 변화한 나를 느껴요. 함께 간 청년들도 변하는 모습들이 보이고. 그래서인지, 청년부장을 맡고 있을 때 청년부가 부흥해서 한때 우리 교회에 청년들이 천명까지 모이기도 했어요.”
원 장로는 신부용 권사와 슬하에 1남1녀를 두었다. 딸은 미국에서 사업을 하고 있고, 파일럿인 아들은 캐나다에서 항공사 취직을 앞두고 있다. 자녀 모두 신앙생활에도 열심이다. 원 장로는 2살 때부터 사촌누나를 따라 안양제일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이를 계기로 나중에는 어머니와 다른 형제(총 7남매) 모두 예수를 믿게 됐다. 지금은 각자 생활과 가정 때문에 다른 교회로 흩어졌고 현재 원 장로와 형님 원덕윤 장로만 안양제일교회를 섬긴다.
남은 바람은 이번에 총회 세계선교부에서 받은 상에 힘입어 더욱 열심히 선교사역하며 전 세계 곳곳에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비록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선교지를 오가는 것이 쉽지 않지만 하늘 길이 열리면 곧 또 떠날 작정이다.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세상을 살아갈 힘을 얻는 원 장로의 충전방식이다.
/한지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