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침례회 한밭중앙교회 박옥수는 경북 선산군에서 1944년 6월 출생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인 길기수 선교사의 금오산 집회에서 크게 감화를 받고 1962년 19세 때 길기수의 제자가 되었고 외국의 선교사로 나가기 위해 합천 산골에서 훈련을 받다가 군에 입대하였다. 1968년 6월 8일 전역 후 신림동 어린이 천막집회 후 김천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 ‘믿음의 방패 선교회’의 딕욕 선교사에게 목사 안수를 받고 그 후 20년 간 ‘죄사함 거듭남의 비밀’을 전파하며 대전 한밭중앙교회를 담임하고 있다. 미국의 딕욕 선교사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만든 제자가 한국에 10명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박옥수요 또한 권신찬의 사위 유병언’이라고 한다. 포항에 와서 전도하던 딕욕 선교사가 4.19혁명 직후 대구로 와서 대구 Y.M.C.A 홀을 빌려 일주일에 한 번 정도 복음을 전하는 한편 삼덕동에 있는 오래된 일식집 하나를 빌려 선교학교를 시작했는데 박옥수는 이 선교학교를 졸업하고 6년 후 딕욕 선교사가 한국을 떠나자 불선교학교를 맡아서 운영했다고 한다. 기독교복음침례회 내에는 권신찬과 유병언 장인과 사위 간의 족벌 교권주의와 유병언의 사업체에 교인들의 헌금이 투입되는데 대해서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복음수호위원회를 조직했다.
초창기에 목포에서 권신찬을 추종한 이요한은 순수 신앙만을 내세워 복음수호위원회를 조직하고 유인물을 뿌리면서 권신찬과 유병언을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다. 권신찬이 이 행위를 신랄하게 비판하고 유병언을 옹호하고 나섬으로써 교회는 분열되고, 교인 간에 적대 행위가 만연하였다. 마침내 1983년 2월 13일 오전 11시 삼각지에 있는 교회에는 형사기동대가 경비하는 가운데 유병언파가 이요한파를 몰아내고 독점했으며 유병언은 설교를 통해 이요한을 공격했다. 이 결과 이요한은 대한예수교침례회라는 간판을 서울 강남구 방배동 239-1번지 삼원빌딩 4층에 걸고 박옥수는 예수교복음침례회라는 간판으로 서울 성동구 구의동에 자리잡고 전국적으로 지 교회를 설립했다. 이들의 변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박옥수는 80년대 말 대전으로 본부교회를 옮기고 교단명을 대한예수교침례회로 개칭하는 한편 기쁜소식선교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세력확장에 나섰는데 특히 실내체육관을 빌려 세과시를 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주요교리와 활동상황은 다음과 같다.
이들은 죄사함에 있어 거듭남을 강조한다. 죄와 범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범죄는 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구원을 확증하는 방법으로 *선생님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된 것을 확실히 알고 계십니까.*선생님 거듭나셨습니까.*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언제 어디서 구원받았습니까?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을 확신하십니까. *의인이십니까? 죄인이십니까? *모든 죄가 용서되셨습니까? * 하나님을 두려원 하는 생활이 아닙니까? 구원을 받은 증거가 있습니까? 재림주를 영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라는 질문으로 구원 여부를 판정하려 한다. 이 질문에 “네 글쎄요, 잘 모르겠는데요, 저는 그저 죄인일 뿐이지요” 이렇게 겸손한 대답을 하였다가는 정색을 하면서 “당신은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다. 당장 구원파로 와야 구원을 받는다”고 역설을 한다. 성서에 기록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이 여관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주고 갔는데, 한 데나리온이 하루 품삯이라 두 데나리온은 이틀을 뜻하고 이틀은 ‘하루가 천년 같다’ 했으니 2천년 후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 계시라고 한다. 구원의 문제를 오직 ‘죄사함’에만 국한시킨다. 이들의 활동 상황으로는 <기쁜소식> 이라는 정기 간행물이 있지만 기성교단의 출판사나 방송, 언론 등의 시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으며 TV광고와 함께 매년 대형 잠실실내체육관을 빌려 대대적인 집회를 개최하여 세를 과시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1992년 제77회 총회에서 깨달음 구원 회개 죄인 문제 등 으로 이단으로 규정하였다.
심영식 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