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 김능백 목사가 시무했던 예산교회에서의 옛 추억…
하나님 나라 확장에 크게 공헌한
김응록 장로의 손자이자 김능백 목사 아들 김건철 장로
예산교회에 장학금 3억원·실로암안과병원에 5억원 쾌척!
월남 후 모진 고생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사업에 크게 성공해 하나님 나라 확장에 공헌한 김건철 장로(한국장로신문 명예사장, 동숭교회 원로)가 이번 실로암안과병원 간호사 기숙사 건축비용으로 5억 원을 쾌척했다. 또 그의 아버지 고(故) 김능백 목사가 개척해 크게 부흥시킨 예산교회(김종신 목사 시무)에 장학금으로 3억 원을 헌금했다. 지금까지 김 장로는 알게 모르게 선한 이웃의 역할을 많이 해왔고 서울노회 남선교회 60주년 기념예배당인 삼가리교회와 남선교회전국연70주년기념교회인 조양교회 건축위원장으로도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또 세브란스병원 발전기금으로 25억 원, 실로암안과병원 건축과 학술원 마련에도 10억 원, 한국장로신문사 등 여러 기관 발전에도 공을 세워 그의 인품과 업적을 기리는 분들이 많다. 가지고 있으면서 나눔과 섬김과 베풂을 모르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편집자 주>
“너희가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
필자는 1962년 예산농업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예산농업고등학교는 일제 때 지어진 건물에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으로 많은 인물들을 배출한 학교였다.
그 이듬해인 1963년부터 1964년 졸업할 때까지, 친구로부터 끌려가다시피 예산교회 학생회에 나가면서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는데, 학생찬양대석에 앉아 보기도 했다.
교회에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을 때 예산교회엔 연로하시며 인자하신 김영서 목사님이 계셨고, 김창순 장로님과 김경균 장로님이 계셨다. 김창순 장로님은 북녘 땅에 두고 온 가족 때문인지 대표기도를 하실 때마다 울며 기도하셨다. 또한 나이 지긋하신 홍소복 집사님이 큰 막대기 지휘봉으로 찬양대 지휘를 하셨던 것이 기억난다.
그때 학생회장이 나의 친구인 조성대였고 최근식, 이승헌, 이창호, 그리고 한 해 후배인 최성칠 군이 생각난다. 학생회에는 예쁜 여고생들도 많이 있었지만 당시 나는 바보처럼 한 여학생과도 대화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때 나는 내가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고 내성적인 성격에 수줍음이 많아 용기가 없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1965년 졸업 후 서울에 올라와서는 180도 달라졌다.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하고 고등학교 다닐 때 전국 서예대회에서 여러 번 수상한 실력이 있어 서예학원 강사도 했기 때문이다. 당시 가장 존경받는 서예계 원로 대가이신 원곡 김기승 선생 문하에 있기도 했다. 군에 입대해서는 육군참모총장실에서 근무하고 제대 후 국영기업체인 한국도로공사 사장실에서도 있었고 1970년대에 서예로 국전 입선 국전작가가 되었으며 35세의 젊은 나이로 목동중앙교회 장로가 되는 등 하나님은 선한 손길로 나를 인도해 주셨다.
언젠가 내가 하나님 은혜에 감사하면서 생각하기를, 예산교회에 가서 “내가 모든 사람들이 선망하는 국전작가가 되었다”, “교회 장로가 되었다”고 자랑하고 간증하리라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왜냐하면 예산교회는 내가 처음으로 어린 시절 학습 받은 교회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런 기회는 놓쳐 버렸고, 이젠 나이 들어 자랑할 것도 없고 원로장로로서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지금은 60년 가까이 세월이 흘러 그때 추억들이 뇌리에 가물가물하지만 인상 깊은 것은 1963년 그해 겨울, 크리스마스를 맞아 새벽송을 돌던 날이다. 그날따라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눈보라가 치고 한밤중에 어찌나 춥던지 눈을 맞으며 교회에서 출발해 오리동 골목과 신작로를 따라 논과 밭을 지나 예산중학교롤 거쳐 주교리 예산여고를 지나 고개 넘어 예산 역전 주위까지 ‘기쁘다 구주 오셨네’ 찬송을 부르며 새벽송을 돌 때에, 어린 나이에도 그 기쁨이 이루 말할 수 없어 마음 가득 감동을 품고 마치 강아지가 졸랑졸랑 따라가듯이 찬송하며 걸었다. 예산역 근처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굴뚝들이 늘어선 잠사 회사가 있었는데, 우리 예산교회 김경균 장로님은 그 회사의 아주 높은 이사님이었다.
그 시절은 춘궁기요 초근목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웠던지 쇠고기국을 먹기란 1년 중 설날 아니면 추석 때나 구경할까말까 하던 시절이었는데, 한참 새벽송을 돌다보니 인품이 근엄하고 인자하신 김경균 장로님이 사시는 집이 우리의 마지막 종착지. 어느덧 밝아오는 새벽, 지치고 꽁꽁 얼어붙은 몸으로 장로님 댁에서 펄펄 끓여놓은 쇠고기 국물로 식사를 대접받을 때의 그 맛이 얼마나 맛있던지! 말할 수 없이 융숭한 대접을 받고 얼었던 몸이 나도 모르게 녹아 버렸다. 까마득한 지난날 아름다운 추억들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김종신 담임목사와 편찬위원장인 최재경 장로가 펴낸 예산교회 60년사를 살펴보면, 예산교회는 1951년 4월에 처음으로 예배를 드렸으며, 1대 목사는 김능백(金能白) 목사, 2대 지익풍(池益豊) 목사, 3대 최정복(崔正福) 목사, 4대 김능백 목사, 5대 최철(崔哲) 목사, 6대 김영서(金永西) 목사, 7대 허수복(許守福) 목사, 8대 김종신(金鐘晨) 목사로 이어졌다. 내가 다닐 때 교회 건물이 김능백 목사 때 지어진 것으로 많은 장로님들이 세워졌다.
그동안 예산교회의 기둥이 되어 온 장로님들은 김창순 장로를 필두로 김경균, 김호승, 김기백, 홍수복, 이종구, 한건탁, 임종빈, 이정모, 이종팔, 박삼진, 한순철, 유계준, 정기열, 정상철, 은준희, 황규범, 이일호, 최재경, 유병태, 김창득, 장희석, 유태원, 한정철, 김남권, 라권찬, 임종화, 최수철, 김의상 장로 등 교회의 기둥 역할을 한 분들로 하나님 나라에 기록되고 가문의 영광이 되리라 믿는다.
김종신 목사는 1996년 1월 7일 부임하였으며 최재경 장로가 평하기를 “우리 목사님은 성품이 온화하고 매사에 차분하며 세심하고 모든 것이 계획적인 동시에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요시함은 물론 민주주의 방식으로 문제 해결하는 자세를 갖고 계시며 무엇보다도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일하신 목사님”이라고 극찬을 했다.
김 목사는 그동안 전도학교 운영, 총동원초청 전도주일 지키기, 필리핀 민도로 예산기념교회당 기공과 헌당식을 가졌으며, 봉사관도 개관하고, 매봉수련원 개원, 50주년 기념 감사예배, 마하나임 찬양대 카보드단 창단, 중국선교사 파송, 예산 연합복지재단 설립 등 엄청난 일들을 해왔다. 그리고 충남노회 노회장도 지냈다. 예산교회는 2011년 5월 5일 창립 60주년 감사예배를 성대하게 거행했는데 1대 목사인 김능백 목사의 장남 김건철 장로(동숭교회 원로)가 참석축사를 했다. 김 장로는 고창교회를 창설했고 도산 안창호 선생, 고당 조만식 장로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독립운동가요 순교자이신 김응록 장로님의 손자시다.
김건철 장로의 선친 김능백 목사는 6·25 때 공산당의 폭정에 못 이겨 아들과 함께 남하했다.
김능백 목사는 1962년 4월 8일 예산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고 서울에 사는 아들 김건철 장로와 함께 사시다가 1965년 3월 27일 소천, 예산교회에서는 목사님을 기리는 기념비를 교회 본당 왼쪽 공터에 세웠는데 비문 내용은 이렇다.
“장하고 미쁘시도다. 주님의 종으로 주님의 교훈대로 살고 주님의 사상을 몸소 실천하면서 주님의 가신 길을 가시다가 지쳐 쓰러지신 주의 종 김능백 목사님을 여기에 소개하노라. 목사님은 1950년 1·4후퇴시 예산에 오시어 흩어졌던 교인들을 모아 교인과 같이 동고동락하시기에 끼니를 굶으시면서까지 지방으로 다니시면서 연조를 얻으시고 한편 미군 물자를 얻어 피눈물로 이룩한 웅장한 성전이 여기 있으니 한 구석 한 모퉁이 돌 한 개를 놓기까지 목사님의 정신과 손이 안 간 곳이 없었다. 목사님께서는 몸소 주님의 생활 정신을 본받아 악의악식하면서 교우와 같이 생활을 하시면서 위로를 아끼지 않으셨으며 특히 조국통일을 갈망하시는 애국일념과 철의 장막에서 고생하는 동포를 생각할 때에 울분을 참지 못하여 부정과 불의가 가득한 현시대를 폭탄 같은 설교로 시정과 회개를 촉구하시며 몸부림치는 기도로 마침내 쇠약하시어 병드시니 교회를 사임하시고 효성이 지극한 아들 김건철 장로 내외의 봉양도 효력을 못 보고 1965년 3월 27일 하늘나라 본향으로 가시니 아, 위대한 사상가요 고결한 인격자요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정의의 사도요 기도와 영감으로 많은 영감록을 기록하여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그 음성을 후세에 영원히 기념하고자 온 교우 일동은 목사님의 공적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어 다만 이 기념비를 건립함으로 그 뜻을 삼고자 하노라.”
김건철 장로는 그날 축사에서 선친이 즐겨 부르던 찬송가 563장 ‘예수 사랑하심을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날 사랑하심 성경에 쓰였네 아멘’ 찬양으로 축사를 대신했는데, 수많은 성도들로부터 박수갈채를 받았다.
그 자리에, 옛날 학생회장이었던 조성대와 나도 초대되어 참석해 극진한 환대를 받았으며 그날 설교는 서울 연동교회 이성희 목사가 ‘교회 일꾼의 정체성’이라는 제하로 말씀을 전하여 큰 은혜를 받았다.
67년이 흐른 지금, 그때 그렇게도 아름답고 찬란했던 예산농업학교는 황성옛터로 변했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와 같이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 쓸쓸한 마음이었다. 다행히 그 시절 전교학생회장이었던 잠업과 유동조와 임업과 박기도 친구가 지금도 예산교회에 다니고 있어 감사하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더욱 왕성하여 교회도 잘 짓고 성도들도 늘어 예산 지역에서 많은 영혼을 구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교회로 성장 부흥 발전하고 있는 교회인 예산교회를 간단히 나름대로 소개해 보았다.
春波 홍덕선 장로<합동 목동중앙교회·원로장로·서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