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은 맹인에 비해 일반인에게 잘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다. 잘 설명되지 않는 면도 있지만 농인에 대해 한참이나 이야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듣는 사람이 나중에 이야기하는 것을 보면 “아 그 맹인이요” 하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화자는 계속 농인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맹인을 상상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농인이 신학교 입학시험을 보러 갔는데 설명을 듣고서 “아 그 맹인이 시험보러 왔군요” 이야기하여 “그 농인입니다”라고 하였으나 또 이어 “아 맹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는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이 우리의 의사결정에 무의식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것을 나타내 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
이러한 일이 어째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 통역을 맡아 같이 갔던 목사님의 의견은 아마도 옛날에 농인과 맹인이 같이 다니던 맹아학교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하는 말씀을 하셨다. 상당히 일리 있는 이야기이다. 농학교와 맹학교가 같이 있던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분리된 상태로 있으며 학교 이름도 각각 농학교, 맹학교로 사용하고 있다.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없을까? 필자의 그간의 체험으로는 맹인은 확실한 장애인으로 인식이 되어 있고 별다른 설명이 없어도 그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일반인들이 잘 이해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농인은 이야기를 해 보기 전에는 특별한 장애를 발견하기 어려우며 이야기를 상대방에게 해 보았을 때 비로소 소통이 잘 안되고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 다른 언어에 대한 생소함을 느끼기는 하지만 그 장소를 떠나면 음성언어로 소통하는 집단과 수어를 쓰는 집단과의 차이를 실감나게 느끼지 못하고 그저 수어를 쓰는 사람들이 있구나 하는 정도의 생각을 하며 지낸다. 청인 세계로 들어오면 그 생각을 잊어버리기가 쉽다. 장애인 하면 떠오르는 대상으로 맹인이 우선시되며 농인은 외견상 청인과 차이가 없으므로 구체적인 장애가 무엇인가 하는 점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농인과 맹인의 불편함과 언어소통의 방법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지 않고 지내던 사람은 장애인 이야기가 나오면 평소 제일 불편하게 지낼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맹인을 떠올리게 된다. 성경에도 예수님이 많은 장애인을 고치셨지만 유독 농인에게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신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다른 장애를 가진 사람과 다른 면을 긍휼히 여기신 듯하다. 농인은 그들이 청각장애인이라고 불리는 것보다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으로 인식되기 원하며 그들의 언어인 수어가 하나의 언어체계를 가지고 있기에 이 언어가 공식적인 언어로 사용되어지기를 바라고 있으며 수어를 사용하는데 불편함이 없는 사회가 되기를 원하고 있다. 즉 수어를 사용하며 일상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없을 뿐 아니라 법정에서, 병원에서 그리고 대학교에서 등 수어가 통역인을 통하여서든지 아니면 수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통하여서든지 편하게 소통되기를 원하고 있다. 농인 당사자는 장애인으로서보다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소수민족으로 인식되기를 원한다. 그 태도가 특별히 장애인으로 대우받고 싶지 않은 심리로 이해될 수 있다.
이러한 특수 상황이 일반인으로서 농인을 인식하기 어려운 일면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안일남 장로<영락농인교회·사단법인 영롱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