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세종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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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날 아침 한글학회 회장 권재일 교수로부터 사진 한 장을 받았다. 살펴보니 권 교수가 중학 시절 한글날 소감을 적은 일기였다. 역시 권 교수답게 소싯적 일기까지 보관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남다른 한글사랑이 오늘 한글학회 회장으로 이끌었구나 생각하며 혼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뒤 만난 자리에서는 자연스레 한글이 화제에 올랐다.
한글의 우수성과 과학성, 그리고 한글을 창제한 세종에 관해서는 우리 국민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터이지만, 뜻밖에도 권 교수로부터 한글 창제에 관해 새롭고 놀라운 사실들을 듣게 된 것이다.
교과서에는 세종이 집현전 학자들에게 명하여 한글을 창제한 것으로 쓰여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실은 한글이 세종의 독자적인 창작물이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신하들의 반대로 세종은 독자적으로 비밀프로젝트를 추진해 왔고 1443년 창제 후에 비로소 신하들 앞에서 발표했다고 한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 자신이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해도 혼자만의 힘으로 한글 28자를 완성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 이후 세조 때까지는 『삼강행실도』 등 약간의 서적이 한글로 간행되었으나 1504년 이후에는 한글의 공식적인 사용이 금지되었고, 궁중 여인들이나 승려, 양반집 부녀자를 중심으로 민간에서 통용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구한말 1894년 갑오경장에 이르러 비로소 공식문서에 한글 사용이 허용되었다고 한다. 한글이 조선의 지배층에서 얼마나 철저히 배척되어 왔는가를 여실히 알 수 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한글의 창제 원리에 대해 온갖 추측만이 난무하다가, 1940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한글이 당대 최고 수준의 음성학적 지식에 기초하여 체계적으로 창제된 것임이 밝혀졌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우리가 지금은 잘 알고 있는 자음과 모음의 제자원리가 1940년에야 비로소 알려졌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리고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개화기 한글의 보급에 개신교의 역할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는 것이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전도를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이 성경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전의 편찬, 문법체계의 확립, 표준말의 정립 등의 작업이 이루어지면서 한글의 보급과 체계적인 연구가 이루어진 것이다.
최초의 사전으로는 1880년 파리외방선교회 소속의 선교사들이 『한불자전』을 편찬하였고, 곧이어 1881년 『조선어문법』도 발간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 근대사에서 기독교가 한글을 통한 문화창달에도 크게 기여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런데 권 교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내 필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의문은 과연 세종이 어떤 마음으로 한글을 창제했는가 하는 것이다. 『훈민정음』을 보면 세종이 말과 글이 달라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는 백성들을 불쌍히 여겼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 당시 부제학 최만리가 주장한 바와 같이 그때의 시대 상황에서 한문을 버리고 다른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단적으로 말하면 문명세계인 유교문화권을 떠나 오랑캐 나라가 된다는 뜻일 뿐 아니라 대국인 중국에 도전하는 것이므로 정치적으로도 극히 위험한 발상임을 세종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세종실록에 기록된 이런 최만리의 반대 상소가 더 현실적인 판단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오백여 년이 지난 지금, 시대를 뛰어넘어 그 빛을 발하는 세종의 혜안과 함께, 시대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백성과의 공감과 소통을 더 소중히 여기는 세종의 마음이 절절하게 다가온다.
김완진 장로
• 서울대 명예교수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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