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다 왕국의 히스기야가 왕위에 있었을 때(주전 715~687/6) 구약 세계에 군림했던 세력은 앗수르(앗시리아) 제국이었다. 히스기야 왕 재위 기간의 앞뒤로 50년간, 약 100년 동안은 앗수르 제국의 전성기로서 그 세력이 최고조에 달했다. 앗수르 제국의 왕들은 무적의 군대를 이끌고 종횡무진 달리며 주변의 나라들을 정복하고 영토를 확장했다. 고대 제국들은 모두가 무자비한 정복자들이었지만, 그중에서 앗수르 제국의 잔혹성은 악명이 높았다. 예언자 나훔은 앗수르 제국의 수도 니느웨를 가리켜 ‘피의 도성’이라고까지 했다. (나훔 3:1)
히스기야는 앗수르 제국이 한창 맹위를 떨치고 있던 때, 유다의 왕이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기 7년 전, 앗수르 제국의 군대는 북이스라엘 왕국을 공격했고, 결국 수도 사마리아가 함락되었고 북 왕국의 역사는 종말을 맞았다.
그 후,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도 공격했다. 히스기야 왕 때,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20만 대군을 이끌고 예루살렘 원정길에 올랐다. 예루살렘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앗수르 제국의 손에 유다 왕국도 북이스라엘과 같은 처절한 종말을 맞을 것인가? 위기 상황에 예루살렘에는 예언자 이사야가 있었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을 지켜 주시고 위기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선포했다.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을 가리켜 이르시기를, 그가 이 성(=예루살렘)에 이르지 못하며, 이리로 화살을 쏘지 못하며… 오던 길로 돌아가고, 이 성에 이르지 못하리라. 이는 여호와의 말씀이라.” (왕하 19:32-33 = 사 37:33-34)
천리길을 달려 예루살렘에 당도한 앗수르의 군대가 포위 공격을 시작하려 할 때, 앗수르군 진영에 갑자기 큰 재앙이 밀어닥쳤다. 들쥐가 옮기는 전염병이 급속히 퍼져 무려 185,000명에 이르는 앗수르 군대가 거의 전멸한 것이다. 이사야의 말씀대로, 앗수르 군대는 예루살렘을 향해 화살 한 발 쏘지 못하고 왔던 길로 돌아갔다.
앗수르 제국의 무소불위한 위세 앞에 주변 나라들은 공포에 떨며 숨을 죽였다. 그러나 내심 그들은 앗수르 제국의 폭압에서 벗어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열왕기하 20장에 기록된 역사적 사실을 읽어본다. “바벨론 왕 부로닥 (또는 므로닥) 발라단이 히스기야가 병들었다함을 듣고 편지와 예물을 그에게 보낸지라.” (왕하 20:12 = 사 39:1)
바벨론의 왕이 히스기야 왕의 병문안차, 친서와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냈다는 내용이다. 언뜻 보면 별 문제가 없는 기록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당시 역사적 상황에서 보면 몇 가지 큰 의문이 제기된다. 첫째, 이때는 앗수르 제국이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장악하고 있었던 전성기였다. 앗수르 제국의 왕 이외에 ‘바벨론의 왕’이 있을 수 없는 때였다. 그런데 ‘바벨론의 왕’이 히스기야에게 병문안 사신을 보냈다는 것이다. 어떻게 된 것인가?
둘째, 당시 바벨론은 앗수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바벨론은 과거의 바벨론 제국의 권세와 영화를 누렸던 중심 수도였다. 반면에 유다 왕국은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다. 그런데 유다의 왕이 병이 났다고 ‘바벨론의 왕’이 친서와 예물과 함께 사신을 보냈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이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