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비사] 선교 구역을 예의 있게 양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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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내한 선교사들이 선교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때는?
한국을 찾은 선교사들이 선교에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것은 언제일까. 1889년 미국 북장로교 총회 회의록은 “1889년부터 선교사들이 한국 교회의 발전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다고 적고 있다. 이때는 바로 전 해인 1888년 여름 소위 ‘어린이 소동’(Baby Riots)이라는 터무니없는 반기독교 소동을 겪은 뒤였다. ‘어린이 소동’이란 선교사들이 어린이들을 잡아 그 눈을 빼내어 카메라 렌즈로 쓴다는 등의 괴소문이 퍼지면서 일어났던 소동이다. 선교사역을 음해하고 훼방하려는 반기독교 세력의 이러한 악랄한 음모를 보면서 오히려 선교사들은 한국교회 발전에 자신감을 가졌던 것이다.
얼마 전에 들은 어떤 목사님의 설교가 떠오른다. 예수교회가 가지고 있는 세 가지 역설을 말씀하셨다. 첫째, 조직의 역설, 둘째, 부의 역설, 셋째, 핍박의 역설이다. 교회가 조직화할수록, 교회가 부를 추구할수록 그 조직과 부를 의지하고 성령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핍박의 역설이란 교회는 박해를 받으면 받을수록 불 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한 예로서 1949년 중공이 설립될 무렵 70만 명이던 기독교인들이 1978년 중국의 개혁개방 정책 전까지 공산당 정권 하에서 30년간 온갖 모진 고난과 핍박과 박해를 당했는데 그 수가 7000만 명으로 100배나 늘어났다는 말씀을 하셨다.

2. 선교 구역을 예의 있게 양보하다
한국 선교 초기 한국에 현지선교부 즉 미션을 둔 장로교회들이 넷 있었다. 1889년 ‘미국 장로회 미션 및 빅토리어(호주) 미션 연합공의회’는 1893년 캐나다장로회까지 포함하여 ‘장로회정치를 쓰는 미션공의회’로 발전했다. 그런데 이 공의회는 두 가지 업적을 남긴다. 첫째, ‘네비우스 확대 선교 정책’의 확립이요, 둘째, ‘교계 예양’이었다.
첫째 정책은 한국의 근대화를 실질적으로 가져와 한국의 역사에 길이 새겨지는 혁혁한 공헌을 남겼다. 이 선교 정책은 근로계급 전도와 한국의 후대를 위한 부녀자 전도, 크리스천 소녀교육을 강조했다. 이들은 계층으로 따지면 하류층이다. 하류층은 숫자가 많다. 동시에 이 선교 정책은 자립, 자급, 자립선교를 선교 원칙으로 제시한다. 자립, 자급, 자립선교는 근대시민 곧 중산층의 특징이다. 하류층을 전도하면서 중산층의 특징을 가진 한국교회를 제시하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가진 믿음이 여기 역력하다. 절대 다수의 하류층이 예수 믿고 자신들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깨닫고 열심히 일하여 주님을 섬기면서 자립, 자급, 자립선교의 중산층으로 사회 계층이 상향 이동하게 됨을 미리 보았다.
둘째 정책인 ‘교계 예양’은 선교 구역을 예의 있게 양보한다는 것으로 ‘일종의 모자이크 이론’이다. 미국북장로교는 황해도 평안도 경상북도, 미국남장로교는 전라도 충청도, 호주장로교는 경상남도, 캐나다장로교는 간도와 함경도를 맡았다. 모자이크 조각처럼 자신의 구역에서 선교에 충실 하는 것이 곧 전체 한국 선교의 충실로 자동적으로 이어지게 하는 정책이었다.

류금주 목사
<(총회인준)서울장신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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