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광장] 습관과 선입견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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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지하철 등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해 본 사람은 한 번쯤 다음과 같은 현상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고장 때문에 멈춰 서 있는 에스컬레이터를 걸어 올라갈 때, 의식적으로 분명히 멈춰 선 것을 알고 걸어 올라가는데도 발걸음은 마치 에스컬레이터가 움직이고 있는 것처럼 엇박자로 뒤뚱거리게 되는 신기한 현상 말이다. 평소에 이같이 몸이 마음이 따로 움직이는 것과 같은 일을 겪으면서 마음에 의문이 생겼었는데, 최근 진화심리학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그러한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많은 행동과 마음과 생각이 오랜 진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적응한 결과 의식적 노력과는 무관한 심리적 습관이 선천적으로 우리의 몸에 배게 된다는 것이 진화심리학의 설명이다. 순간적으로 올바른 판단을 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수많은 긴박한 상황에서 의식적 판단을 기다리지 않고 반사적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습관들이 그러하다. 예를 들어 불에 손이 닿으면 반사적으로 손을 움츠리는 행동이 전형적인 예이다.

시각에 관련해서도 매우 중요한 착시현상이 있다. 우리는 주위의 사물을 볼 때 마치 카메라가 사진 찍듯이 객관적으로 세상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진실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 다음과 같은 유명한 심리학 실험이 있다.
사람들에게 같은 풍경을 찍은 두 장의 사진을 보여주는데 한 장은 풍경 그대로인데 반해, 다른 한 장의 사진은 한 귀퉁이에 멀리 보이는 큰 나무 한 그루를 지우고 하늘 배경으로 처리해서 보여 주고, 두 사진이 다른 점을 찾아 보라고 하는 실험이다.
숨은 그림 찾기와 비슷하지만 다른 이 실험의 결과가 충격적인 것은 실제로 많은 경우에 사람들이 뜻밖에 매우 큰 차이를 잘 발견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심리학자들은 그 이유를 인간의 뇌가 시각정보를 처리하는 특별한 방법에서 찾는다. 어느 한순간의 시각정보의 크기에 비해 우리 뇌가 처리할 수 있는 정보량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에 실제로는 각 장면의 상당 부분을 미리 상정한 정보로 대체하고 세상을 본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보는 시각적 대상의 상당 부분은 사실은 우리 자신이 지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최근에 미국의 한 저명한 신경과학자의 주장은 더욱 충격적이다. 신경과학자 도널드 호프만은 우리의 시각적 인식은 객관적인 실재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앞에 파란 색칠을 한 의자가 놓여있는 것을 본다고 할 때, 의자의 모양과 색이 의자의 객관적인 특성이 아니고 우리가 주관적으로 그렇게 인식할 뿐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벌이나 고양이에게는 같은 의자가 색도 없고 모양도 전혀 다르게 보인다고 한다. 우리가 의자의 색과 모양을 그렇게 인식하게 된 것은 오랜 진화 과정에 적응한 결과이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마치 컴퓨터 화면에서 파일 하나를 휴지통에 끌어다 버릴 때 우리는 컴퓨터 내부의 회로와 프로그램에 관해서는 전혀 모를 뿐 아니라 알 필요도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가 객관적인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 사실은 우리의 심리적 습관이나 선입견의 산물일 가능성이 크다는 이 엄연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보다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자유롭게 판단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선입견의 노예일지도 모르고, 새로운 결심을 하지만 사실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속마음이 그 결심을 거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가능성이 열리지 않을까 한다.

김완진 장로
• 서울대 명예교수
• 소망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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