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찾아가는 여러가지 여정…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그린북’(피터패럴리 감독)은 흑인분리정책을 고수하려는 자들과 변화를 꾀하려는 자들의 사회적 충돌과 혼란, 변화가 혼재한 시공간인1962년 미국 남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영화는 이런 시공간에 돈 셜리(마허 샬라)와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를 위치시킨다. 토니는 흑인이 사용한 컵을 쓰레기통에 버릴 정도로 인종에 대해 차별적 시선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생계를 위해 흑인 돈 셜리의 운전기사가 된다. 돈은 천재 클래식 피아니스트로, 사회적 지위와 재력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돈은 남부로 8주간 순회공연을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보디가드 겸 운전기사가 필요했다. 그는 자신에게 있어 이 순회공연이 얼마나 위험한지 설명하며 “사람의 마음을 바꾸려면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린북’,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책은 남부에서 흑인이 머물 수 있는 숙박시설과 식당을 수록한 흑인 전용 여행가이드북이다. 그린북은 이런 일들이 만연한 남부에서 흑인들에게 허락된 공간의 지형, 곧 차별의 지형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돈과 토니는 인종에 따라 고착화된 사회적 계층과 분리정책 기저에 깔려 있는 가정, 즉 우월한 백인과 열등한 흑인이라는 인종적 전형성에 완전히 위배되는 인물이었다.
‘개와 흑인은 입장 불가’라는 팻말이 흔했던 남부에서 품위 있는 돈의 행동과 그의 음악은 흑인 역시 존엄한 인간이라는 것을 피력했고, 백인들의 가혹한 태도는 오히려 품위를 잃은 것이 그들이라는 것을드러냈다. 돈은 ‘품위’ 쪽을 택했고, 그것에 멈추지 않고 고통의 자리로 걸어 들어갔다. 영화가 1962년 남부에 상반된 인물을 교차시켜 인종차별을 효과적으로 비틀고 있다면, 두 인물의 관계 변화는 다른 존재가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 하나의 모델을 제시한다. 친구가 되는 것 말이다.
고통의 자리로 들어간다는 것은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할 용기를 낸다는 것이
다. 편견을 깬다는 것은 교양을 포기하고 무엇을 받아들이는 일일지도, ‘흑인’
대신 ‘돈 셜리’라는 이름을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은 그린북의 여정처럼 위험천만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여정은 거창한 이유가 아니라 생계를 위해서, 필요에 의해서 시작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그때, 그곳에서, 이름을 알게 된 그 사람과 함께 한다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일에 일조하게 될지도 모른다. 새로운 지형을 함께 만들어 가면서 말이다.
민혁(박서준)은 기우(최우식)에게 외국에 가게 됐다며 자신이 과외하던 다혜(정지소)를 맡아줄 수 있는지 물었다. 이게 시작이었다. 기우는 기정이 위조한 재학 증명서를 들고 다혜의 영어 선생으로, 기정(박소담)은 기우 소개로 다혜 동생 다송의 미술치료사로 박사장(이선균)네에 들어갔다. 다음에는 기정 소개로 기택(송강호)이, 기택의 소개로 충숙(장혜진)이 각각 운전기사와 가사도우미로 박사장네에 취직했다. 방법은 거짓말과 모함이었다.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이들 때문에 해고당한 전 가사도우미 문광(이정은)이 초인종을 누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문광은 지하에 중요한 것을 두고 갔다고 했다. 빚쟁이들에게 쫓기던 남편 근세(박명훈)를 4년이 넘도록 지하 벙커에 숨겨왔던 것이다.
영화 ‘기생충’(봉준호 감독)은 이렇듯 박사장, 기우네, 문광 부부를 지상, 반지
하, 지하라는 수직적 구조에 담아 보여준다. 박사장네로 들어가는 상승 계단이 그랬고, 기우네로 가는 하강 계단이 그랬다. 지하 벙커로 내려가는 계단이 그랬다. 박사장은 아내 은교(조여정)에게 운전기사(기택)는 ‘선’을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사장은 겉으로는 예의를 지켰지만 속으로는 ‘선’ 아래 사람들을 경멸했고, 공간을 내주지 않으려 했다. 그 ‘선’은 반지하에 사는 사람이 진입해서는 안 되는 저택의 문턱이었다. 곧 영화는 그 ‘선’을 지상, 반지하, 지하로 시각화하고, ‘냄새’를 통해 지상의 사람이 반지하와 지하를 바라보는 속내를 드러낸다.
영화의 제목은 기우네 가족과 문광 부부를 ‘기생충’이라 명명한다. 영화는 두 가족과 기생충의 공통점을 보여준다. 두 가족은 박사장네서 월급을 받아 생계를 유지했고, 공간의 한 부분을 빌려 생활했다. 기생충은 숙주가 오래 살기를 바라고, 숙주에게 최대한 들키지 않으려 한다. 문광의 남편 근세가 박사장에게 감사하면서 숨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영화는 인물의 관계를 수직적으로 그려냈다. 이러한 시선은 그들이 기생충이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수직관계는 숙주와 기생충의 관계가
아닌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이기 때문이다. 관객이 응원하는 기우네는 도덕적 결함이 있다. 결국 지하로 돌아간다. 이때 관객이 느끼는 불편함, 영화는 이것을 의도했다. 이를 통해 수직적 사회구조에 대한 불편함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이다.
스타트랙 시나리오 공모가 시작됐다. 웬디(다코타 패닝)는 스타트랙에 대해 세
세한 것까지 다 알고 있다. 그녀는 응모작을 쓰기 시작했다. 마감을 앞두고 시나리오는 427쪽에 달했다.
그런데 그녀에게 문제가 생겨 원고를 부치지 못했다. 따라서 이제 시나리오를 제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600km 떨어진 LA 파라마운트 픽쳐스에 직접 가는 것 뿐이다. 웬디에게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의 경계가 뚜렷하다. 자폐스펙트럼 장애를 가진 그녀에게 그 경계는 일상에서조차 높고 견고하다. 웬디는 시나리오에 이렇게 썼다. “논리적 결론은 단 하나, 전진.” 닥쳐올 미지의 세계에 대한 두려움 보다 변화에 대한 필요가 더 크다는 뜻이었다. 결국 그녀는 ‘전진’을 택했다. 파라마운트 픽쳐스로 가기로 한 것이다. 시나리오는 늘 누군가에게 의지하며 살아온 웬디가 스스로 일궈낸 소산이었다. 그러나 600km에 달하는 그 길은 험난했다. 시나리오 제출이 아니라 꼭 ‘전진’이 목표인것처럼 말이다. 사람들은 흔히 익숙한 공간에서 감지되는 위험요소들을 미지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위험요소보다 덜 위험하다고 느낀다.
곧 익숙한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대처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은 공간에서 벌어질 일들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더 크게 다가와 두려운 것이다. 따라서 어떤 골목 끝에 도달했을 때 이것이 벼랑 끝이라고 느껴진다면, 사람들은 그곳을 바다로 가는 길로 인지하기보다 살아오던 육지의 끝, 곧 세상의 끝이라고 느끼기 쉽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의 경계마저 뚜렷한 웬디가 미지의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로 전진했다.
영화 ‘스탠바이 웬디’(감독 벤 르윈)는 웬디의 불안과 두려움, 무모해 보이는 전
진을 통해 세상의 끝은 다른 세상과 맞닿아 있다고, 미지의 세계로 발을 내딛는 순간 우리는 이미 그 길을 걸어갈 힘을 가지고 있다고, 그 여정의 끝에는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전진해야할 때가 오면 나는 두려움 속으로 전진해야만 할 것이다. 벼랑 끝에
묶여 영영 후회하며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영화 ‘왓 데이 해드’(엘리자베스 촘코 감독)는 루스(블리드 대너)의 외출로 시작된다. 버트는 몇 년간 치매에 걸린 루스를 집에서 보살펴 왔다. 니키는 아버지 버트에게 어머니를 시설에 보내자고 제안했다.
지난 60년간 루스와 부부로 살아온 버트는 자신이 그녀를 가장 잘 돌볼 수 있는 보호자라고 자부했다. 의견 차이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고, 결국 부자는 소리를 높였다. 니키에게 아버지는 인정받고 싶은, 사랑받고 싶은 절대적인 존재였으나, 아버지는 니키보다 비티를 신뢰했고, 니키 대신 비티의 남편 에디를 자랑으로 여겼다. 버트는 그가 딸에게 가장 좋은 혼처라고 말했고, 그 말에 비티는 결혼을 결심했다. 비티는 행복하지 않았다. 딸 엠마가 스무살이 되어가는 동안 비티는 남편과의 사이에서 점점 외로워졌고 엠마는 비티와 이야기조차 나누려하지 않았다. 한편 니키는 어머니의 거취 문제로 아버지를 설득하지 않는 비티에게 화가 나 있었다. 그동안 부모님을 돌본 것은 자신이나, 아버지는 비티를 더 신뢰한다고 불평하면서 말이다. 이에 비티는 자신도 결혼 전 가사노동에 시달렸다고 응수했다. 그녀에게 집안일은 힘겨웠지만 아버지와 오빠는 이것을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가족들이 모였다. 그들이 모인 것은 루스 때문이었지만, 비티와 니키의 버거운 현실은 해결되지 않은 과거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그뿐인가. 버트는 자꾸 결혼 전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루스를 인정할 수 없었다. 버트는 그들의 시간과 조우해야 했다. 루스를 원하는 시간으로 보내주고, 과거로 돌아가 자녀들과 이야기를 나눠야 했다. 어쩌면 이 영화가 가족의 옛 사진과 루스의 외출로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화는 시간을 과거로 돌리고, 그곳에서 문제의 실마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영화 ‘왓 데이 해드’는 그들이 무엇을 가졌었는지 묻고 있다. 그들이 가진 것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의 방법은 무엇인지, 그들이 가진 것이 상처라면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말이다. 만약 당신이 ‘사랑’하는 사이지만 여전히 상처를 내고 있다면 영화 ‘왓 데이 해드’는 묻고 있다. 지금이 둘러앉아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완벽한 타이밍이 아닌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