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했을 때, 초대교회 성도들이 성경책보다 먼저 읽은 신앙 서적이 있다. ‘천로역정’이라는 책이다. 1895년 캐나다에서 온 제임스 게일(J. Gale) 선교사가 ‘텬로력뎡’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했다. 공인된 한글 성경이 최초로 출간된 것은 이로부터 16년 후가 되는 1911년이었다. 한국교회 초기 성도들은 이 책을 읽으며 신앙생활을 배워나갔다.
성경 다음으로 많은 언어로 번역된 이 책은 (20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 17세기 중엽 존 번연(John Bunyan)의 작품이다. 이 책은 최근에 영상으로도 만들어져 많은 교회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별로 교육을 받지 못한 존 번연이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기독교 문학의 고전을 저술할 수 있었을까 하고 감탄이 나온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지만, 천로역정과 같은 명작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쓰여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로역정’은 존 번연이 청교도 신앙을 가르치고 전했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갇혔을 때 집필한 것이라고 한다. “광야 같은 세상을 헤매다가 동굴에 이르렀다. 동굴에서 잠이 들어 꿈을 꾸었다.” 이렇게 천로역정은 시작한다. ‘광야 같은 세상’은 힘들고 어려운 세상을 말하고 ‘동굴’은 존 번연 자신이 감옥에 갇힌 것을 뜻한다. 이렇게 이 책은 전체가 ‘알레고리’(풍유)의 형태로 되어있다. 주인공의 이름도 ‘크리스천’이다.
그는 ‘멸망의 도성’을 떠나서 영원한 ‘천상의 도성’을 향해 가는 순례자의 길을 떠난다. 온갖 우여곡절을 겪으며 많은 사람을 만난다. 처음부터 끝까지 도움을 주는 ‘전도자’도 있지만, 잘못된 길로 유혹하는 ‘세상의 현자’도 있고, 의심, 불신, 나태, 교만, 위선, 기만, 허위와 같은 가는 길을 훼방하는 사람들도 만난다. 그러나 믿음, 소망, 신실, 경건, 자선 등 좋은 길벗들을 만나 가는 길에 큰 힘이 되어준다.
‘천성’을 향해 가는 길은 험하고 먼 길이다. 지고 가는 무거운 짐 때문에 절망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기도 하고 세속의 유혹의 숲도 지났다. 가파른 율법의 언덕을 숨차게 오르기도 했고, 좁은 문을 지나 십자가 언덕을 힘겹게 올라갔다. 십자가에 다가가자 그동안 지고 다니던 무거운 짐(죄의 짐)이 신기하게도 모두 벗겨졌다. 그 후로 천성을 향한 긴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고난의 산을 넘고, 겸손의 계곡과 허영의 시장을 지나기도 했고, 감옥에 갇히는 고통도 감내해야 했다. 거대한 괴물 아볼루온(사탄을 의미)을 만나 치열한 전투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마침내 건너는 다리가 없는 사망의 강에 도달했다. 눈을 들어 보니, 사망의 강 건너편 넓은 지역에는 강을 건너온 순례자들을 환영하는 말과 마차들, 그리고 각종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하는 천상의 악대와 악사들이 가득 도열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강을 건넌 순례자들은 한 사람씩 뒤를 이어 천상의 도성으로 들어가는 아름다운 문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렇게 천로역정의 긴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우리들 모두는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천’들이다. 성경 말씀을 교과서로 하고, 천로역정을 참고서로 삼고, 구약시대의 ‘순례자의 노래’ 시편 121편을 노래하면서 올해 한 해도 힘차게 순례자의 길을 걸어가기를 기도한다.
박준서 교수
<피터스목사기념사업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