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인에 대한 이야기를 이제는 많이 했다고 생각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하면 아직도 농인에 대한 개념이 다른 장애에 비해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들곤 한다. 이러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 이유는 농인은 장애 체험을 통해서 이해하기에는 가장 피부에 와 닿기 어려운 장애를 지닌 사람들이다. 또 듣는다는 것이 일상에서 얼마나 깊숙이 모든 분야에 영향을 주고 있는지를 쉽게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옛날에는 전기가 부족하여 정전이 되기도 한 시절이 있었다. 신세대들은 잘 모르는 이야기이겠지만 전쟁 후 공장을 돌릴 전기가 부족하여 일반 가정에선 간혹 정전도 되곤 하였다. 이럴 때를 대비하여 집집이 초를 준비하고 성냥을 어디 두었는지 알아두곤 했다. 잠시 정전이 되면 책을 보기도 어렵고 식사를 할 때도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바느질이라도 하려면 바늘귀에 실을 넣기도 어려웠다. 깜깜한 밤길을 가는 것이 무섭기도 하였다. 잠시 후 전깃불이 들어오면 세상이 환해지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이러한 체험을 한 사람도 많고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얼마나 불편한지를 설명하지 않아도 잘 이해하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자명하다. 그러나 들리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세세히 알기가 어렵다.
짧은 지면상 다 설명하기는 어렵겠지만 아마도 들리는 사람들 중 소리를 안 듣고 1주일을 살아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생활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상상해 본 경우도 없을 줄 안다. 이러한 상황에서 청인이 농인을 이해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특히 다 볼 수 있기 때문에 말을 못해도 책을 볼 수 있고 필답으로 의사소통이 가능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읽고 쓰는 것은 시력만 있으면 되는 일이 아니다. 글자를 해독할 수 있는 독해 능력이 있어야 글을 읽고 뜻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글자는 소리 나는 대로 적은 기호이며 농인의 입장에서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기호가 나열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현상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비슷하여 농인들의 평균 독해 능력은 청인들에 비해 평균적으로 볼 때 상당히 저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한 일을 아무리 설명하여도 실감하지 못하던 한 지인은 농인들과 필답으로 면담을 하면서 많은 농인들은 원만한 필답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이해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필답이나 문자로 온 내용은 수어로 하면 절적하다는 것을 수어를 이해하는 사람이면 수긍이 갈 것이다. 답답해하는 청인을 향해 필자가 모든 서류를 영어로 써 보기 바란다고 이야기하면 당황스러워 한다. 농인들의 외모만으로는 별다른 장애를 인식하기 어렵기 때문에 농인에 대한 이해가 쉽지 않다.
오히려 오해를 살 때도 많으며 올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청인들은 예의에 벗어난 말도 어떤 때는 거침없이 하여 농인들의 마음에 상처를 주기도 한다. 외국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여야 하는 것처럼 농인을 대할 때 먼저 이해하여야 할 사항은, 농인들에게 있어 수어는 모국어이며 한글이 제2외국어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인지하여야 한다. 그것이 그들을 이해하는 첫 걸음이 될 것이며 그들의 사회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안일남 장로
<영락농인교회·사단법인 영롱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