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위량의 제 2차 순회 전도 여행 (56)
구미에서 상주까지(4)
이사야는 아침과 밤을 대조하면서 인간에게 쉬임 없이 찾아오는 아침과 밤의 현실을 말한다. “파수꾼이 이르되 아침이 오나니 밤도 오리라 하더라”(이사야 21:12) 이런 인간의 현실에 대하여 시편 130편 6절은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란 말로 인간 현실의 한계 속에 살아가면서 오직 위로부터 내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고대하며 기다리는 한 구도자의 모습을 시 속에서 묘사한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밤은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인간은 여름과 같은 삶을 살 수도 있고, 여름 동안 풍성한 소출을 거두는 것 같은 은혜도 받고 복된 삶을 살 수 있지만, 누구나 자신의 생애를 살아가는 동안 한 번 이상 혹독한 겨울과 같은 고비를 만날 수도 있다. 그것이 인간이다. 왜 인간은 자신에게 찾아오는 겨울을 피하지 못하는가에 대한 숙제는 인류 역사 이래로 계속 연구되는 문제이다.
요즈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COVID-19) 때문에 온 세계가 공포와 두려움에 젖어 있다. 온 세계가 이러한 공포 속에 처했던 것은 아마도 노아 홍수 이후 처음일 것 같다. 1, 2차 세계 대전이 있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비하면 그것은 그 지역에 국한된 지역 일에 불과하다. 벌써 1년이 넘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부터의 자유가 아직 기약이 없고 그것에 대한 불안감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초등학교 동기 중에 한 친구는 경기도에서 작은 식당을 운영하면서 자식 공부도 시키고 가정을 건사했는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때문에 그 사업을 접었다고 한다. 그 친구뿐이겠는가? 많은 자영업자들이 사업장 임대료도 내지 못하는 형편이고 사업장 문을 닫아야 할 그런 상황이다. 불황을 모르던 사업들이 큰 풍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한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가 인간의 실수나 욕심 때문에 세상에 나타난 것일까? 아님 창조자의 섭리 아래에서 이루어진 일일까?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은 아직도 여러 가지 답을 찾고 있는 과정 속에 있다. 나중에는 그 답을 찾게 될 것이지만, 지금 모든 세계인이 함께 신음하고 이 모진 질병으로부터의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너무나 많은 고통 속에서 온 세상이 몸부림친다. 이런 암담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인간의 한계를 생각하게 된다.
큰 소리 치지만, 인간은 누구나 한갓 작은 피조물에 불과하다. 한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인간이 꿈꾸는 미래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에 대하여 지금 모든 세계인이 고민하며 생각한다. 조물주께서는 낮만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밤도 만드셨다. 낮과 밤을 나누시고 시간을 창조하셨다. 행복만 있으면 더 좋을 것 같은데, 낮만 만드셨으면 더 좋을 것인데 하나님은 왜 밤까지 만드셨을까? 행복한 마음을 느끼는 시간 보다는 아픔과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시간이 더 많은 것이 인간인데 그런 삶을 왜 하나님께서 만드셨을까?
그것에 대하여 인류 이래로 사람들이 무수히 많은 질문을 했다. 그 질문이 시로, 소설로, 그림으로, 음악으로 표현되고 예술로 공연되었다. 답을 찾는 무수하게 많은 시도가 있었고 많은 사람이 답을 말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정확한 답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오는 고뇌의 시간 동안 인간은 후회하고 몸부림친다. 그 방황과 몸부림 속에서 인생을 배우게 되고,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찾게 된다. 방황의 끝은 다시 방황이 될 수도 있지만, 한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 존재를 깨닫게 되고 나중에는 흙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존재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려놓음과 포기 속에서….
현실에 당면한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아직은 희망을 버리지 않고 꿈꾸고 있다. 바로 이런 것이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 아닐까? 겉으로 보기에는 완벽하게 보이고 화려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모든 사람이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이다.
여기에 예수 이외에는 아무도 예외가 없다. 그것이 인간의 한계이다. 이점에서 우리는 서로를 인정하고 서로를 받아 주어야 할 운명의 공동체이다. 서로 격려하고 서로 조언하고 함께 하는데서 공동체로서의 가치를 찾게 된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2-6)
시편 19편에 나오는 시를 읽으면서 자연의 신비에 귀를 기울이는 인간에게 주시는 은밀한 하나님의 사랑을 엿볼 수 있다. 비록 ‘지금은 어둠의 현실’이고 ‘끝을 모르는 공포가 엄습’해 와도, ‘밤은 밤으로 이어져도’, 하나님의 창조는 선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데서 해답을 찾아야 할 것이다. 인간은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존재이기에 불안해한다. 하지만 엄습하는 절망 속에서 살아갈지라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면 그 어둠이 아침을 더욱 찬란하게 만드는 필수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이렇게 밖에 걷지 못하는 인간은 한 걸음 저 너머에 무엇이 기다리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길이 있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은 신의 존재를 인정하는 데서 시작한다. 인간은 유한자로서 한계 안에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신에게 의탁할 때 그때 비로소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그것은 믿음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길이다.
어린 나이에 이 원리를 깨달았던 배위량은 당시 최고로 인정받는 삶과 보장된 생활을 마다하고 가장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던 조선 땅으로 찾아왔고 낯설고 물선 땅으로 찾아와 시골길을 다니면서 이 땅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그들의 아픔을 돌아보면서 그들에게 어둠의 길에서 자유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기 위해 걷고 또 걸었다.
배위량이 걸었던 그 길은 그에게 아픔의 길이었고 고통의 길이었지만, 타인을 살리고 치유하고 자유케 하는 길이 되었다. 그렇다. 우리는 모르고 있었고 까맣게 잊고 있었지만, 배위량이 걸었던 길이다. 그 길 위로 많은 사람들이 무수히 걸었다. 그저 보통의 길이다. 하지만 이 길은 특별한 길이다. 그 길은 자유의 길, 그 길은 회복의 길, 그 길은 평화의 길, 그 길은 생명의 길, 그 길은 헌신의 길, 그 길은 함께함의 길, 그 길은 충성의 길이다.
옛부터 내려온 우리말 중에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란 말이 있다. 쉽게 포기하지 않고 인내하면 결국은 좋은 결실을 거두게 된다.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은 아픔이 있어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내일을 꿈꾸는 사람에게는 내일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 해는 […]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시 19:2-6)라고 시인이 말했듯이 누가 뭐라고 하든, 날은 날의 시간을 지키고, 밤은 밤의 시간을 지킨다. 해는 해의 길을 가고 밤은 밤의 길을 간다. 배위량은 구미에서 상주 낙동까지 멀고 지루하고 힘든 길을 걸었다. 그에게 그 길은 지루하고 끝없이 펼쳐진 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끝까지 묵묵히 걸었다.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현대 한국인들이 배위량이 걸었던 그 길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찾게 되고, 자신의 삶을 중히 여기는 법을 배우게 되고, 주어진 시간을 성실히 살아가기를 배울 수 있다면, 어둠이 찾아와 고통스럽게 해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밤이 지나면 찾아오는 아침이 반드시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때 신의 은총을 사모하게 되고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
희망을 가진 사람은 힘들고 어려워도, 비록 실패하는 일이 있어도,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쉼없이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갈 것이다. 묵묵히!
배재욱 교수
<영남신학대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