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세 살의 최영섭 예비역 해군대령(신촌교회 안수집사)은 1950년 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한 지 4개월 만에 6.25를 겪었다. 전쟁 발발 하루만인 6월 26일 부산 동북쪽으로 기습 침투하던 북한 무장선박을 격침했다. 북한군 최소 6백여 명이 승선했던 것으로 추정된 함정을 격침한 이 전투는 6.25 최초의 해전이자 승전이었다. 전사(戰史)학자들은 이 전투에 대해 부산항은 당시 한국에 군수보급품과 증원병력을 투입할 수 있는 유일한 항구로 무장 상륙군을 수장 시킨 것은 전략적으로 결정적인 사건이라고 평가한다. 최 대령은 70년간 전장과 사회를 누비며 조국을 지켰다. 임관 직후엔 우리나라 최초의 전투함인 백두산함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로 활약했다. 나라에 돈이 없으니 해군 장병이 월급을 내고 해군 가족들이 바자와 뜨개질로 돈을 벌어 미국에서 사온 전투함이 백두산함이다.
최 대령은 지난 70년의 소회를 묻자 “온 국민의 힘으로 지켜낸 나라를 지켜 나가야 한다”고 했다. 그는 6.25 당시 아무 준비도 없었던 우리나라를 지킬 수 있었던 건 온 국민이 합심했기 때문이라며 “소년병과 여성, 50대 지게부대가 합심해 전 국민이 힘을 합쳤다”고 했다. 최 대령은 최근 우한 코로나 사태에 대해서도 “지금은 온 나라가 병 때문에 어려운 전례 없는 국난의 시기”라며 “온 국민이 나서야 국난이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최 대령은 금성충무무공훈장 등 무공훈장 4개를 받고 1968년 전역한 뒤 안보 강연을 다니며 전사자 유족 찾기 운동 등을 펼쳤다. 6.25 당시 장사 상륙작전에 투입됐다가 숨진 11명의 문산호 민간인 선장과 선원 명단을 찾고 이들의 공을 재조명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최 대령은 민간인이지만 나라를 지키려 참전했던 그런 사람들을 기려야 하는 건 당연하다고 했다. 그는 국민 행복의 울타리는 국가라며 “6.25전쟁 71주년을 맞아 우리 국민은 그 점을 되새겨야 한다”고 했다. 그는 “인도의 타고르 시인은 한국이 동방의 등불이라고 했지만 또 힘이 없으면 곤경을 유발한다고 했다”며 “이런 것을 우리 국민이 아는 게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이라고 했다. 1950년 2월 25일 최 대령과 함께 임관한 해사 3기 54명 중 생존 용사는 9명이다.
얼마전 해군참모 총장은 동기생 회장인 최 대령에게 축전을 보냈다. 해군 총장은 “선배님들은 나라가 풍전등화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최일선에서 목숨을 바쳐 적과 맞서 싸웠으며 자랑스러운 해군의 전통을 이어가며 대한민국 발전을 이끄는 역군으로 활약하셨다”며 “선배님들의 이러한 희생과 헌신에 대한민국은 지금까지의 번영을 이룰 수 있었다”고 했다. 최 대령은 병원에 입원 중이거나 거동이 어려운 동기생들에게 축전을 직접 전달했다고 했다. 최 대령은 아들 넷을 장교로 복무시켰다. 그의 둘째 아들이 감사원장 최재형 장로(신촌교회)다. 최 장로는 고등학교 때는 소아마비 동급생을 3년씩이나 등에 업고 등교했고 사법연수원 때도 동창을 업고 출퇴근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그에 대한 선행 일화는 우리를 감동케 한다. 한마디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우리 주변엔 나라를 움직인다는 사람들이 대개 이기주의자들이요, 정의감이 없는 자들이요, 애국의 혼이 없는 자요, 비겁한 자요, 부도덕한 자들이다. 나라가 점점 기울어 간다. 이럴 때일 수록 최영섭 대령 부자를 반면교사로 삼아 정의가 강물처럼 흘러넘치는 나라를 만들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