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1일 주한미군지위협정(SOFA) 합동위원회를 열고 전국 12개 미군기지 가운데 우선 용산기지 2개소를 한국에 반환하기로 합의했다. 12개 기지란 전국의 흩어져 있는 미군기지 총 80개 중 이미 작년까지 68개 기지가 반환처리됐고, 아직 남아있는 12개 기지를 말한다. 의정부, 동두천, 하남, 대구 등 다른 11개 지역도 순차적으로 반환할 예정이다. 용산 기지도 5개 구역으로 산재해 있지만 우선 스포츠필드와 소프트볼 경기장 등 2곳을 먼저 받기로 했다.
정부가 추진해 온 용산기지는 138년 전인 1882년 임오군란 때부터 외국군 주둔기지로 사용되어 온 슬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구한말 열강의 제국주의침략이 한창이던 시절 일본군의 절도있고 잘 훈련된 제식훈련의 모습을 본 민비(閔妃)가 처음 받아들인 것이 일본군의 신식군대의 제도였다. 그래서 신식 군대는 우대하고 구식 군대는 1년간 급여도 제대로 안 주면서 푸대접을 하게 됐다. 이것이 발단이 되어 1882년 군대가 반란을 일으킨 사건이 ‘임오군란’이다.
즉, 임오군란은 대원군과 민비의 권력다툼 속에서 대원군이 선동하여 구식 군대가 폭동을 일으킨 사건이며, 이때 일본 장교 굴본예조(掘本禮造) 소위를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여 불태우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대원군이 재집권하고 민비는 장호원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사건 직후 고종은 신변보호를 위해 청군을 불러들였고 청군은 대원군을 납치하는 한편 왕십리와 이태원에 있던 구식 군대를 습격 170명을 체포하고 11명을 참수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청군 3,000명이 용산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것이 외국군의 용산기지 사용의 시발이다.
일본은 조선에 배상을 요구하는 한편 일본 공사관 경계를 위해 일본군을 인천에 상주시키게 되었다. 이로서 조선에는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하게 됨으로서 양국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그후 청일전쟁, 노일전쟁을 거치면서 일본이 승리하게 되자 일본군이 청군을 축출하고 용산기지의 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망이후 대한민국 건국과 한반도의 안정을 위해 미군이 상륙하게 되었다. 이로써 용산기지는 청군→일본군→ 미군으로 바뀌면서 외국군 기지로 활용되다가 138년 만에 한국의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용산기지의 반환을 환영한다.
문제는 돌아온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한국의 자존심을 지켜가며 이 땅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용산기지는 외국군의 주둔지로서 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 국방부와 육군본부(1988년까지 주둔) 등이 있어서 대한민국을 지켜온 ‘안보의 요람’이라는 역사적 의미도 함께 생각해야 된다. 미군은 떠나갔지만 그 넓은 땅에 아파트나 짓고 주민 생활공간으로만 활용한다면 우리는 미래가 없다.
사실 용산기지는 청군과 일본군이 주둔하던 기간 동안은 외세침략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6.25전쟁 이후 주한미군이 자리잡은 이후부터는 공산군의 침략을 막아주는 안보의 요람이며 한미동맹의 상징으로 부각되었다. 만일 주한미군이 없었다면 우리는 6.25전쟁 이후 모든 것이 폐허된 상태에서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산기지는 한미동맹 차원을 넘어 국가발전을 뒷받침해 준 구심체 역할을 해주었다고 본다.
현재는 북핵 위협과 국지전 도발이 더욱 가중되어 있는 상황에서 무조건 미군기지를 환수 받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국가 안보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어떤 상징물이라도 하나 세워져야 한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항공우주박물관이나 첨단 방어시스템을 갖춘 안보지하도시 등 군사과학이 총 망라된 새로운 도시가 건설된다면 국가의 미래도 보장될 수 있고 전통적인 군사기지로서의 의미와 가치도 퇴색되지 않을 것이다. 평양에는 지하도시가 잘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우리는 왜 못하나? 더 좋은 기술과 자본이 있고 조건도 마련되었다. 정부의 의지와 국민적 합의만 모으면 된다.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공원이나 주택 등 생활공간은 지하도시 위에 건설해도 된다. 조급하게 서둘지 말고 여유로움을 갖자.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