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뒤에 남는 것은 쓰라린 상처뿐이다. 죽음, 가난, 고통은 말할 것도 없고 전쟁고아 얘기는 눈물 없이는 듣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고 명하셨다.
전쟁고아가 사람의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9.28서울 수복 때 부터였다. 물론 그 전에도 고아들은 있었다. 미 제5 공군부대의 군목으로 있던 러셀 블레이즈델(Russell L. Blaisdell) 중령이 서울 시내를 들어가다 큰 충격을 받았다. 2-3살쯤 돼 보이는 여자 어린애가 길가에 앉아 울고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때부터 그는 부모 잃은 애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단시일 내에 1,059명이 모였다. 한국 정부에서는 고아원 운영능력이 없어서 미군들이 성금을 모아 고아원을 운영했다. 그런데 1950년 중공군의 침략으로 또다시 서울을 빼앗기고 후퇴하게 되었을 때(1.4후퇴), 블레이즈델 군목은 큰 고민에 빠졌다 이 어린아이들을 버리고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서울 시민의 80%가 피난을 떠나 서울은 텅 비었다. 군목에게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한국 공군이 3,000포대의 시멘트를 인천에서 제주도로 옮기기 위해 해군 상륙용 수송선을 준비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아이들을 그 배에 함께 태워 보내기로 하고 인천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나 선박은 작고 낡아 아이들을 태울 수 없었다. 군목은 당시 서울에 있는 제5 공군부대를 찾아가서 긴급한 사정을 말했다. 딱한 소식을 들은 당시 공군 작전참모 로저스 대령은 사령관을 대신해서 C-54 수송기 15대를 일본에서 김포공항으로 오도록 조치해 주었다. 그러나 인천에서 서울로 다시 고아들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수송차량이 없어서 막연했다.
그때 군목의 눈에 작전 대기 중이던 미 해병대의 차량들이 보였다. 옳다 됐다. 군목은 미 해병대 트럭이 있은 쪽으로 가서 급한 사정을 얘기하고 지금 당장 고아들을 인천에서 김포공항으로 긴급 수송해야 하는데 도와달라고 명령하다시피 졸라댔다. 지휘관의 허락 없이는 불가한 일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도우셨는지 해병대 차량을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간신히 차량을 얻어 타고 1,000여 명의 고아들을 김포공항으로 데리고 왔다. 약속 시간보다 2시간이나 늦었지만 수송기는 기다리고 있었다. 12월 20일 마침내 고아들은 제주공항에 도착했다. 제주공항에는 평소 고아들을 사랑했던 제5공군의 조종사 딘 헤스(Dean Hess) 중령(대령진급)이 먼저 와 있었다. 그의 주선으로 제주 농업학교에 고아들을 수용할 수 있게 되었다. 유모차 공수작전은 이렇게 성공적으로 마쳤다.
전쟁이 끝난 후, 헤스 대령은 미국으로 돌아가 전역했고, 1956년 회고록 ‘전송가’를 펴냈다. 그 책에서 ‘고아수송작전’을 소개했고 그때부터 그는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됐다. 대한민국에서 주는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서울에서 제주도까지 우여곡절 끝에 고아수송을 완성한 블레이즈델 중령은 상관의 명령 없이 작전용 해병대 트럭을 사용한 ‘죄’로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조사를 받았다. 다행히 악의적인 범죄가 아니었으므로 처벌은 피하고 일본으로 쫓겨 가는 신세가 되었다. 일본으로 쫓겨 가면서 군목은 헤스 중령에게 고아들을 부탁했다.
여기서 우리는 과연 전쟁고아들의 진짜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두 사람의 공로가 다 인정되지만 전송가 책을 써서 세상에 알게 한 ‘딘 헤스’ 대령이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유명해 졌다. 그러나 처음부터 고아들을 모아서 고아원을 시작했고 또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제주도까지 데리고 간 블레이즈델 군목이 아니었으면 고아들은 서울에서 적군의 손에 넘겨졌을 것이다. 생사도 불분명해졌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전쟁고아의 아버지는 ‘블레이즈델’ 군목이라고 생각된다. 헤스 대령보다 블레이즈델 군목에게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전쟁고아의 아버지는 첫째가 블레이즈델 군목이고 두 번째가 헤스 대령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후 3년간의 전쟁을 치르면서 전쟁고아는 54,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미군의 손에 구출되고 입양되었다. 미군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그들은 다 희생됐을 것이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