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다음에 목회를 한다면 교회 이름을 ‘뿌리 깊은 나무 교회’라 짓고 싶다. 그런데 실은 교회가 아니라 우리 신앙의 뿌리가 깊어야 한다. 누구라도 고난은 있다. 나도 고난 속에서 자랐고 고난을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그것이 인생이며 우리네 모습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바람이 불고 비가 올지라도 끝까지 버텨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뿌리 깊은 나무가 되어야 한다. 피하고 싶은 고난이 올 때 나무는 자신을 지탱하기 위하여 더 깊이 뿌리를 내린다. 강한 비바람이 불 수록 나무는 더욱 가열차게 자신의 뿌리를 내리려고 몸부림친다. 고난이 불어 닥치면 우리도 뿌리가 뽑히지 않기 위해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한다.
요즘 들어 교회가 무엇이며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며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어떤 생각으로 목회를 하며 믿음이라는 가치를 붙잡고 살아가는가? 우리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에서 일 년 넘게 무너진 일상을 살고 있다. 주일마다 예배당에서 드려지던 의례적인 예배는 기억도 가물거릴 만큼 생소해졌다.
나섬의 사역을 시작한 지 어느덧 30여 년이 흘렀다. 참 오랫동안 나섬이라는 가치를 품고 살았다. 그동안 수없이 많은 고난과 마주했고 때로는 너무도 고통스러워 도망하고 싶은 순간도 많았다. 내 몸에는 그 고난의 흔적이 뚜렷이 남았고 나는 고통의 흔적을 끌어안고 매일 밤 울며 밤을 지새우기도 하였다. 지금도 보이지 않는 눈을 대신해 온몸의 감각이 동원되고 레이더가 작동되어서인지 자주 두통에 시달린다. 그래도 예수 믿는 자요, 목사라는 직함이 나를 붙들고 여기까지 살게 한 것 같다.
끝까지 비티고 버텨야 할 텐데 이젠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지는 것을 느낀다. 종종 두려움이 엄습하고 나를 우울하게 한다. 목사로서 교인들에게 설교하는 문제는 나의 실존적 문제다. 과연 나는 설교할 자격이 되는 사람인가? 본디 설교란 삶이어야 하고 삶에 대한 최소한의 신앙적 고백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나는 설교하는 일이 매우 힘들다. 그래서 매일 설교하는 강단을 떠나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그러나 선뜻 그 강단을 떠나지 못하고 있으니 이 또한 뿌리 깊은 나무의 힘인가?
가나안 교인들의 마음이 이해되는 것이 나에게는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인다. 하긴 나도 평신도였다면 가나안 교인이 되었을 것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목사가 되었고 지금 여기에 남아 있다. 나는 성서가 가르치는 남은 자인가? 그것은 정말 고민스러운 지점이다. 요즘 나는 이런 생각과 고민을 하며 나를 반추하고 또 돌아본다. 그리고 내 아들과 손자에게는 남으라고, 뿌리 깊은 나무가 되라고 말한다. 이것이 과연 솔직한 나인가, 아니면 교육되고 의식화된 목사의 어법인가? 나는 요즘 이런 생각으로 산다.
유해근 목사
<(사)나섬공동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