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로는 전쟁의 산물이다. 전쟁을 하다 보면 반드시 포로가 생겨난다. 6·25전쟁에서는 23만8,000여 명의 포로가 발생했다.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는 17만3,000여 명, 공산군에게 잡힌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6만5,000여 명이다.
유엔군에게 잡힌 공산군 포로 17만3,000여 명 중 8만8,000여 명은 그들의 자유의사에 따라 자유의 길을 선택했고, 나머지 8만5,000여 명은 공산 측으로 송환됐다. 자유의 길을 선택한 8만8,000여 명 중 중공군 출신의 반공포로 4만1,000여 명은 중립국(인도)으로 송환됐다가 제3국으로 갔고 2만여 명은 자유중국으로 송환됐다. 북한군 반공포로 2만7,000여 명은 거제와 제주도에 수감됐다가 이승만 대통령의 결단으로 1953년 6월 18일 석방됐다. 이것이 6.25전쟁포로의 팩트다.
그런데 공산 측은 국군과 유엔군의 포로를 처음에는 6만5,000여 명이라고 밝히더니 실제 포로교환 때는 1만 2,760명(19.6%)만 송환했고 5만2,000여 명은 실종 처리를 하고 끝내 보내지 않았다. 특히 공산 측은 그들의 통계에서 한국군 327명과 미군 21명 그리고 영국군 1명이 자유진영으로 송환을 거부했다고 밝히고 보내지 않았다. 이는 거짓일 가능성이 크다. 이들이 국군포로 실종자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처형 또는 병사했거나 강제노역을 시키기 위해 붙잡아 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일부는 인민군에 편입시켰다. 이는 명백한 제네바협정 위반이다. 북한에서 포로 생활하다가 1994년 귀국한 조창호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에는 그 당시 500여 명의 포로가 생존해 있었다고 한다.
한편 미군 포로들은 공군 조종사 출신이 많았는데 주로 압록강 변에 수감되어 있었다. 이들에게는 세균전을 퍼트렸다는 자백을 얻어내기 위해 많은 고문과 협박이 가해졌다. 당시 소련은 미국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해 중공을 시켜서 미군이 1951년 11월 이후 세균전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도록 중공을 압박했다. 미 공군 조종사의 포로는 총 131명이다. 그중 78명이 1951년 11월 이후에 생포돼 세균전에 대한 고백을 강요받았고, 38명이 고문을 이기지 못해 허위 자백했다. 고문이 시작되면서 먹는 음식도 최하로 변했다. 고백을 거부한 조종사들은 지독한 고문에 시달려야 했고 독방 감금, 죽음에 대한 위협, 갖가지 악행을 저질렀지만 이를 인내로 극복하고 버텨낸 조종사가 40명이나 됐다
미군 포로들은 현대전에서 가장 야만적인 대우를 받았다. 대부분 영양실조에 걸렸고 체중은 40% 가까이 빠졌다. 부상한 환자들은 대부분 치료를 받지 못해 사망한 경우가 많고, 포로 중 35%는 송환된 뒤에도 동상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특히 미군 실종자 중 30%는 포로교환 때 살아왔으나 58%는 공산군의 후방에서 죽었다.
또한 미군 포로 6,425명은 북한에서 처형됐다. 행군 도중 쓰러지면 도로변에 버려둬 죽게 했다. 공산군 수용소에 도착한 후에도 옥수수밥만 한 줌씩 먹다가 영양실조로 죽어간 미군 포로는 2,730명으로 확인됐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서도 공산군은 국제적십자사가 제공하는 구호품을 받지 않았다. 나머지 3,700여 명도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우여곡절 끝에 1952년 4월-9월까지 3차에 걸쳐 포로 교환이 진행됐다. 국군과 유엔군 포로는 한국으로 왔고, 중공군과 북한군은 북으로 송환됐다.
자국귀환을 거부하는 중공군포로 2만여 명은 자유중국으로, 중립국을 선택한 88명은 인도로 떠났다. 포로가 송환되던 날, 북으로 가는 공산군 포로들은 판문점 들어서자 자신들이 입었던 옷과 비품들을 길에 내던지며 속옷만 입고 붉은기를 흔들며 미친 듯이 공산군 군가를 불러댔다. 사상이 변치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쇼였을 것이다.
배영복 장로<연동교회>
• 한국예비역기독군인연합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