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 내 길의 한 줄기 빛 이만영 장로 (35)

Google+ LinkedIn Katalk +

주식회사 광일의 전성기(4)

무에서 창조된 광일의 역사

그런 의미에서 주식회사 광일은 무에서 창조된 역사였다. 처음에는 이만영 회장의 생각에서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역시 동창실업에서의 경험은 그가 새로운 창조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단초가 되었다. 당시 동창실업 연구실에서 개발하고 있었던 제품은 식품 제조에 필요한 식품첨가물이었다.
비록 그 연구에 대한 결과물을 보지 못하고 동창실업 연구실이 폐쇄되는 일이있었지만 그러한 사실이 전개될 지는 꿈에도 모른 채 원하는 제품을 개발하기 위해 기초적인 사전지식이 없던 이만영 회장은 남들보다 더욱 열심히 일하며 까다로운 기술자들의 어깨 너머로 자신이 모르던 기술을 익혀야 했었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개발하면 될 것 같다는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동창실업 연구실 폐쇄에 대한 이만영 회장의 아쉬움과 실망감은 매우 컸다. 그러나 그러한 아쉬움과 실망의 마음속에는 새로운 역사 창조의 씨앗이 깃들어 있었다. 그것은 어렴풋한 한 줄기 생각이었다. 그 작은 생각이 점점 강력한 도전의 정신으로 발전했고, 이만영 회장은 창업을 결심하게 되었다.
동창실업 연구실에서 개발 중이던 식품처가물을 자신이 직접 개발하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바로 이와 같은 극적인 결정을 통해서 주식회사 광일의 역사가 시작될 수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에게는 아무 것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의 상태였다. 이러한 순간에 대해 훗날 이만영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하였다. 주식회사 광일이 40년의 역사를 맞이하는 순간이었다.

“올해는 주식회사 광일의 창립 4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입니다. 아무 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시작해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가 모든 것을 개척해 왔고 만들어 왔습니다. 비록 현재의 회사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한 상황에 있지만 주식회사 광일의 지난 40년간의 성장에 대해서는 당당한 자부심과 자긍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있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회사의 운명을 우리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의 회복입니다.”

이와 같은 2006년도 시무식 격려사에 따르면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에서 요구되는 모든 것을 개척하며 만들어 온 것이 지금의 광일이 되었다. 처음에는 단지 ‘필요한 것은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는 자신감과 자부심’ 그것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바로 그것이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 홀연히 있었던 것이다. 여기에 역사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가 있었다.
40년이 지난 다음 이만영 회장이 그 역사를 되짚어 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로 그것은 실상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바로 그것이 새로운 역사 창조의 씨앗이었다. 그것을 발견하는 것으로 역사의 특별한 계획과 섭리의 비밀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다시 회복하고자 이렇게 말했던 것이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해 보자면, 이만영 회장은 이 당시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면 당연히 어디에서든 직장을 구해 취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고 회고한다. 한 가정의 가장이면서, 두고 온 고향의 가족들에게는 책임이 막중한 장남이었다. 자신만 바라보고 있는 식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머리에서 동창실업 연구실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밤을 새워가며 실험하고 만들어가던 연구가 계속해서 떠올랐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그동안 쏟아온 일에 대한 집념이 그의 마음 속에서 무한한 가능성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이상하게 머리 속을 맴도는 또렷한 하나의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경험은 누구나 한번쯤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역사의 특별한 계시와 섭리로 깨닫는 사람은 별로 없다. 역사 안에서의 무한한 가능성의 문은 바로 그렇게 어이없이 열리고야 마는 것이다.
이 시기에 대해서는 1960년대 이만영 회장과 함께 일했던 이창무 박사의 증언이 있다. 이 증언을 통해 이만영 회장의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와 이만영 회장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이것은 이창무 박사가 이만영 회장의 회고록 출판을 위해 직접 작성한 글이다.

“성봉 이만영 씨를 먼저 소개하기 전에 이병은 씨를 소개하겠습니다. 이병은 씨는 성봉 이만영 씨의 아버지, 저에게는 집안 할아버지뻘이 되는 어른으로서 너무나 훌륭하신 분입니다. 말씀도 적으며 우리들의 이야기를 잘 듣고 상담해 주는 반세기 전의 집안 멘토셨습니다. 그리고 저의 아버지와 막역한 관계로 이만영 씨의 아버지는 존경받고 신뢰받는 어른이셨습니다. 이병은 씨의 맏아들인 이만영 씨를 만나게 되었을 때 저는 기독교에 입문한 상태였고, 이만영 씨는 기독교를 이미 받아들인 성령의 사람이었습니다. 때가 되면 새벽 예배에 참석하고 시간이 나는 대로 말씀을 읽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묵상하며 인내하는 젊은 신학생이었습니다. 이만영 씨의 어머니에 대해서도 몇 자 적어볼까 합니다. 여러 남매를 두신 어머니로서 시골 적은 농토에 농사를 지으며 순박하게 살아오신 어른이십니다. 남에게 해 되는 말은 하지 않고 가난하지만 정직하게 살아온 어른입니다. 모두가 어려운 때여서 인고의 삶을 살았습니다. 저와 이만영 씨는 하나님의 은혜로 광일생산기술연구소에서 함께 일하게 되었습니다. 민간기업의 연구소로서 1960년대 이 나라의 공업 발전을 위하여 설치하였지만 성과가 뚜렷하지 못함으로 폐쇄되고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불운을 맞았습니다. 이만영 씨는 연구소에서 연구하던 일부 과제와 기구를 제공받고 악전고투 끝에 주식회사 광일이라는 대한민국 굴지의 식품첨가물 제조회사를 성공시켰습니다. 오직 이만영 씨의 믿음과 성실 근면한 바탕에 주위의 기도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이만영 씨의 사랑이 오늘을 있게 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동업했던 조용희 명예 회장님의 뒷받침이 컸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을 저는 깊이 느끼고 있습니다. 또 감사할 것은 이만영 씨와 함께 했던 전 사원들의 인내와 열정이 지금의 이만영 씨를 있게 한 큰 원인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만영 회장은 이창무 박사에 대해 초창기에 광일생산기술연구소에 근무하도록 사랑으로 주선해 준 신앙의 친척으로 가장 가까이에서 항상 은혜를 베풀어 준 분으로 기억하며 은인으로 마음속 깊이 감사하고 있는 분이다. 이와 같은 주변의 은인이 있었기에 이만영 회장은 도전을 이어갈 수 있었다.
‘한 번 도전해 보자!’ 그리고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라도 앞으로 나가자!’ 이러한 자신감과 도전 정신이 그의 막연하고 무모한 결정을 구체화 시키는 가장 강력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이만영 회장은 평생의 동지를 만나는 축복을 얻게 되었다. 조용희 명예회장은 이만영 회장이 평생에 걸쳐 만났던 자신의 인생을 뒤바꿔 준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정봉덕 장로
<염천교회 원로>

공유하기

Comments are clos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