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원산 광석교회의 부흥에 고 찬익이 끼친 공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시간만 있으면 밖에 나가 노동자들을 붙들고 전도하였는데 어떤 때는 노동자들이 일하는 곳에 가서 며칠이고 같이 일하기도 했다. 또한 그 품삯을 받아 노동자들에게 주어 그들이 너무 감사해서 교회에 안 나오고는 못 견디게끔 사랑을 베풀었다.
또 어떤 때는 멀리 문천, 안변까지 가서 게일 목사와 같이 전도하였는데 장구 치고 북을 치며 사람을 모아 놓고 유창한 말솜씨로 전도하여 그 지방 사람들이 게일 목사를 찾아 원산 <예수 집>에까지 오도록 만들었다. 그러니 어찌 게일 목사가 고찬익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898년 장로교 선교 공의회에서 선교지를 분할할 때 함경 남북도를 캐나다 선교부로 이관하였다. 따라서 미국 북장로교회 선교사인 게일과 소안론은 원산을 떠나야 했고, 게일 선교사는 서울 연동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게일 목사가 처음 원산에 왔을 때는 캐나다 토론토 대학 학생회에서 파송한 선교사로서 목사의 신분이 아닌 대학을 졸업한 평신도였다. 그 후 북장로교회 선교사 마펫 목사와 친하게 되고 또한 한국 최초의 의료 선교사인 헤론이 세상을 떠나자 그 미망인과 총각으로 결혼했다. 다음에 마펫이 북 장로교 선교부 산하 노회에 추천하여 목사가 되었고, 그때부터 북장로교 소속이 되었다.
연동교회에 온 게일 목사는 원산에서 함께 온 고찬익과 마음이 맞아서 교회를 부흥시키기 시작하였다. <연동교회 80년사>를 보면 고찬익의 열성적인 전도로 교인 수가 급증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문제는 연동교회 교인들은 고찬익을 멀리하였다. 연동교회에는 서울 양반들이 많았는데 고찬익은 평안도 사람이며 또 원산에서 온 갖바치로 상놈이었다.
고찬익은 1904년 연동교회 당회가 조직될 때 연동교회 교인들은 고찬익을 많이 반대했다. 양반 교회에서 상놈을 장로로 세워 당회를 조직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게일 목사는 고찬익을 적극 지지하여 연동교회 최초의 장로로 장립을 받았다.
동년 9월 13일 서울 동현예배당에서 회집한 제4회 조선예수교장로회 공의회에 경성소회 총대로 참석하고 여기서 추천을 받아서 경조와 함께 평양신학교에 입학했다.
1905년 제5회 공의회에서는 길선주, 심취명과 함께 전도위원회 초대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현예배당에서 역사적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가 조직되고 한국 최초의 목사 7인을 안수하는 자리에서 36명의 장로 중 고찬익 장로는 신학생으로서 요한복음 9:25을 택해 예배를 인도했다. 그 성경구절은 맹인이 예수의 기적으로 눈을 뜬 ‘분명한 사실’에 관한 말씀이었는데 자신의 변화를 간증한 것이었다.
평양신학교 방학 때 열심 있는 전도자로서 가가호호를 방문 전도해 대 부흥의 불을 붙였다. 이때 연동교회는 ‘한국인의 자금에 의한 한국인의 기술’로 303평 대지 위에 133평의 네 번째 교회당을 봉헌하였다.
이승하 목사<해방교회 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