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 사람들은 차별의식이 강하다. 사람을 볼 때 그 사람이 가진 지위나 권력이나 학식이나 재물에 따라 판단하고 차별하여 대우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신다. 그래서 하나님께는 오랫동안 신앙생활 했다고 해서 더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다. 또 직분이 있고 무엇을 가졌다고 해서 귀하게 쓰임 받는 것이 아니다. 얼마나 주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그 열정으로 한 영혼을 귀하게 사랑하느냐를 보시고 쓰시는 것이다.
오늘 본문 말씀 2절에 보면,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라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예루살렘에 들어가 활동했음을 밝힌 내용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는 것은 사도 바울이 항상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순종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주의 종의 가장 중요한 자세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것이다. 그래야 뜨거운 열정과 믿음을 가지고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특히 목회는 사람의 영혼을 책임지는 일이기 때문에 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귀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3년 동안 아라비아 광야에 가서 철저히 기도훈련을 했다.
오늘날 수많은 신학교가 있지만 하나님의 종을 길러내는 최고의 신학교는 신학을 잘 가르치는 곳이 아니다. 물론 신학을 잘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기도 훈련’이다. 왜냐하면 신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신학이 사람의 영혼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영혼을 살리시기 때문이다. 신학의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가르치지 않도록 울타리를 쳐주는 것이다. 양을 기를 때에 울타리가 없으면 양이 잘못된 길로 나아가 맹수에게 잡혀 먹히거나 벼랑에서 떨어져 죽을 것이다. 이처럼 신학은 양들이 잘못된 신앙을 갖지 않도록 경계선을 그어주고 이 이상 넘어가지 않도록 붙잡아 준다. 특히 신학은 이단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역할을 해 준다.
그런데 영적으로 양을 살찌우게 하고 새끼를 낳게 하는 것은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역사하심인 것이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신학공부를 했다고 해서 다 갖추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신학공부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이 철저히 그렇게 준비했다. 그는 특별히 신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지만 말씀과 기도로 늘 깨어 있어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받고 있었다. 그런데 성령충만하니까 아무리 뛰어난 신학자라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하나님의 뜻을 깊이 있게 이해하는 영적인 눈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신약시대 최초의 공의회인 예루살렘 공의회에 이방선교의 대표자로 참석하게 되었다. 이 회의는 AD 49년 예루살렘에서 첫 번째 이루어진 총회였다. 이 총회의 주제는 예수님을 믿은 이방인들에게 대하여 율법과 할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에 관한 것이었다. 이때 바울은 다른 사도들과 함께 대당한 위치에서 회의에 참석하였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9장 30절에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된 자가 많으리라”는 말씀대로 주님은 나중 된 바울은 크게 높여 쓰신 것이다.
본문에 보면 바울은 이 회의에 참석하여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었다. 첫째는 복음의 진리를 밝혀서 이방인들에게 더 이상 바리새인들이 주장하는 율법조항과 할례를 강요하지 않도록 한 것이다.
두 번째 바울이 그곳에서 취한 행동은 다른 사도들 앞에서 주눅들지 않고 떳떳했다는 것이다. 본분 2절에 보면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했다’는 것은 당대 최고의 사도들인 베드로와 요한 그리고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 앞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주님의 뜻을 전했다는 것을 말한다. 여러분 누구든지 성령으로 충만한 사람은 어떤 사람을 대하든지 당당할 수 있다. 베드로도 성령충만 받은 이후에는 그 누구 앞에서도 당당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죄목으로 예루살렘 공의회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유대인들 가운데 가장 높은 사람들이 위엄을 갖추고 베드로를 가운데 세워 말하기를 “너희가 무슨 권세와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느냐”고 심문하였다. 그러나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 오히려 그들에게 담대히 복음을 전했다. 그러자 그들이 베드로가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가 본래 학문 없는 평범한 사람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겼다고 말씀한다. 여러분, 이 모습이 바로 성령충만한 사람의 모습이다. 성령충만한 사람은 그 누구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한다.
신상훈 목사
<태평양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