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에는 ‘두개의 바다’가 있다. 하나는 ‘갈릴리해’이고, 다른 하나는 ‘사해’이다. 똑같이 요단강에서 흘러 들어가는 바다인데 갈릴리해는 물이 맑고, 고기도 많으며, 강가엔 나무가 자라고, 새들이 노래하는 아름다운 생명의 바다인데 비하여 사해는 수질이 불결하고 바다에 염분이 너무 많아 고기도 살 수 없으며, 새들도 오지 않고 어떠한 생물도 살지 않는 죽음의 바다이다. 똑같은 요단강 물줄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갈릴리 바다와 사해는 왜 이렇게 차이가 날까? 어째서 하나는 생명이 숨 쉬는 바다가 되고, 다른 하나는 이름 그대로 죽음의 바다가 되었을까? 그 이유는 요단강 때문도 아니고 토양 때문도 아니고 기후 때문도 아니다. 그 이유는 다른 것에 있음을 보게 된다.
갈릴리해는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을 가두어 두지 않는다. 한 방울이 흘러 들어오면 반드시 한 방울은 흘러 나간다. 주는 것과 받는 것이 똑같이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반면, 사해는 들어온 강물을 절대 내어놓지 않는다. 한 방울이라도 들어오면 자신의 소유라고 그것을 자기 혼자서 가져버리고 한 방울의 물도 내놓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생명의 바다와 죽은 바다! 받은 만큼 주는 바다와 받기만 하고 주지 않는 바다!
사람에게도 두 부류가 있다고 본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고 피차간에 주고받는 소통의 여부에 따라 우리가 사해가 될 수도 있고 갈릴리해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우리도 서로 소통하면서 사랑과 물질의 나눔에 최선을 다하며 행복을 창출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로 ‘적극적인 소통의 사람’을 찾아본다.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에서 ‘도마(Thomas)’가 소통의 은사를 가진 인물이라 말하고 싶다. ‘도마’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은 그가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이 흔한 설명이다.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보지 않고는 믿지 않겠노라”고 도마가 말한데 근거를 두고 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현장에 다른 제자들은 있었지만 도마는 우연히도 현장에 없었다. 예수님 이전에 어느 누구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은 없었으므로 예수님의 부활사건은 실로 믿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그런 측면에서 도마는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기보다는 진실을 추구하고 소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고 본다. 예수님이 살아나심을 확인하고 싶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언하고 싶었던 게 도마의 본심이었으리라. 그가 예수님을 만나 부활의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는 감격이 벅차올라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십니다(요 20:28)”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본다. 그는 이스라엘의 북동쪽에 있는 바벨론과 페르샤를 통해 인도의 남부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했다. 사도 도마는 AD 70년 인도에서 순교를 당하게 된다.
“현대의 불행은 소통이 없는 불통의 시대라는 데 있다”는 말은 열 번 스무 번 공감이 가는 명언이다. 현대인의 가정이 깨어지고 사회전체가 점점 혼란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사실은 불통의 시대의 반증이 아닐까 한다. 행복하게 출발한 부부가 어느 시점에 이르러 이혼을 하면서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성격차이로 헤어진다”는 말을 하고 있다. ‘성격차이’란 바로 ‘소통이 안 된다’는 뜻이다. 이런 불통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도마가 보여준 것처럼 자신의 생각을 상대에게 정확히 전달하고 질문과 대화를 통해서 의심을 극복하고 상대방을 받아들여 수용하는 것이 필요한 시대를 현대인들이 살아가고 있다.
죄로 인해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하나님과 더 깊은 만남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더 깊은 소통을 가져야 한다. 우리가 고뇌하는 모든 짐을 십자가 밑에 내려놓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민, 연약함, 믿음 없음 등, 이 모든 것을 주님께 가지고 나아가는 결단이 필요하다. 여기에서 처음에 제시한 화두 ‘두개의 바다’로 갈라지는 근원적인 원인은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됨을 깨닫게 된다.
문정일 장로
<대전성지교회•목원대 명예교수>